| ▲ 대형마트는 단순히 무언가를 구매하는 오프라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가족들과 함께 장보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공간일 수도 있다. 사진은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가족. <연합뉴스> |
퇴근한 뒤 함께, 아주 편한 옷차림으로, 슬리퍼를 찍찍 끌고 갈 수 있는 대형마트가 얼마나 가까운지만 봤다. 카트를 끌고 이것저것을 구경하면서 시식도 하고, 운이 좋다면 마감세일하는 초밥을 주워 담는 그런 삶이 행복할 것이라 막연하게 꿈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주변 시세보다 싸게 5분만 걸어 나가면 대형마트가 있는 집을 전셋집으로 구했고 한동안 상상했던 삶을 살았다.
서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무료해질 때쯤 “마트나 다녀올까?”라는 말을 자연스레 건넨 기억, 터덜터덜 마트로 들어가 특별한 목적 없이 카트를 밀던 기억은 지금 돌이켜도 기분 좋은 기억이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리 가지 않았다. 난데없이 대형마트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 대형마트는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이커머스에 대응하기 위해 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알짜 점포들을 열심히 매각하던 중이었다.
대형마트가 갑자기 문을 닫으니 우리 부부의 삶도 꽤 불편해졌다. 온라인에서 채소나 과일 등 신선식품을 주문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당장 먹을거리를 챙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미리 챙겨놓지 않으면 항상 무언가를 빠뜨리고 끼니를 챙겨 먹게 됐다.
이때부터 이커머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선식품은 그래도 보고 사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수가 없으니 한두 번 시키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4~5년 가까이 됐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부터 더 이상 대형마트를 자주 찾지 않게 됐다. 가야 할 이유가 딱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손가락만 까딱하면 다음 날 새벽, 집 앞에 모든 물건이 잘 배송돼 있는 데 굳이 시간과 발품을 들여 마트를 찾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두 달 전 한국을 대표하는 오프라인 유통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낸 분이 “쿠팡과 대형마트의 매출 차이를 보면 답이 보이잖아요.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라고 말할 때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통계를 보면 전체 유통시장에서 온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육박하지만 대형마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형마트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형마트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도 한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일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간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르게 하고,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간식 하나를 사주는 정겨운 일상이 그립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형마트를 주위에서 찾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2019년만 해도 전국 424개였던 대형마트 점포 수는 현재 336개까지 줄었다.
대형마트를 둘러싼 규제가 이들의 영향력 후퇴에 바람을 넣는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른 의무휴업과 영업시간 제한이다. 실제로 마트에 가볼까 싶다가도 검색해 보면 ‘휴무일’이라는 안내 때문에 집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꽤 된다.
정치권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다. 대형마트를 둘러싼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대형마트의 경쟁 상대가 전통시장이나 골목상권에서 쿠팡과 같은 이커머스로 옮겨간 지 오래인 만큼 과거의 유통환경을 전제로 만들어진 규제를 지금까지 유지하는 것이 적절한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규제 개선 논의는 지난 정부부터 이어져 왔고 정치권에서도 선거철이나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거론됐다.
하지만 정작 법을 바꾸기 위한 구체적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형마트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정치권이 대형마트 규제 철폐를 진지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활용하는 것 같다는 볼멘소리였다.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화두만 던져놓을 뿐 실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규제를 당장 해소해도 대형마트가 될까 말까 한 상황까지 왔다는 점이다.
홈플러스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긴급자금 2천억 원이 투입되는 등 회생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소비자들의 발길을 되돌리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홈플러스에서 빠져나간 매출이 다른 대형마트로 고스란히 옮겨가는 것도 아니다.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홈플러스의 기존 매출을 100이라고 했을 때 이 가운데 60가량은 이미 온라인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과거에는 한 대형마트가 문을 닫으면 경쟁업체가 그만큼의 고객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소비자들이 아예 다른 유통채널로 이동하고 있다. 대형마트 한 곳의 위기가 경쟁업체에는 기회가 됐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대형마트 산업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 ▲ 이커머스는 이미 유통의 대세다. 되돌릴 수 없는 흐름으로 여겨진다. 이제는 대형마트에게 채웠던 족쇄를 하나둘씩 풀어도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사진은 쿠팡 배송차량. <쿠팡> |
이쯤 되면 대형마트를 둘러싼 규제를 언제까지 유지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규제를 풀어준다고 대형마트가 곧바로 과거 전성기를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소비자의 구매 습관은 이미 달라졌고 이커머스의 경쟁력도 그만큼 강해졌다.
하지만 해볼 수 있는 일조차 하지 못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의무휴업일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 대형마트가 새로운 형태의 매장과 서비스를 실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믿는다.
가족이 함께 나와 시간을 보내고, 직접 물건을 고르고, 예상하지 못했던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자는 얘기다.
신혼집을 구할 때 꿈꿨던 것도 결국 그런 일상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얘기하며 카트를 밀며 장을 보는 일.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모여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대형마트가 다시 그런 공간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낡은 규제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상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유통산업발전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형마트에 채워놓은 족쇄를 이제는 풀어줄 때가 됐다. 대형마트를 살리는 일은 단순히 오프라인 유통기업 몇 곳을 살리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남희헌 유통&4차산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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