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재명 정부의 핵심 금융정책을 꼽으라면 단연 ‘생산적 금융’이다. 생산적 금융은 금융회사 자금이 이자장사에 그치기 쉬운 부동산 등 담보대출에 머물지 않고 첨단전략산업, 벤처창업시장, 녹색금융, 지방금융 등 국가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는 생산적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금융대전환을 말한다. 싱가포르는 아세안은 물론 아시아를 대표하는 금융선진국으로 생산적 금융 측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은 국가로 꼽힌다. 비즈니스포스트는 싱가포르의 금융이 발휘하고 있는 경쟁력을 직접 느껴보고 K생산적금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직접 모색해보고자 한다.
-자본시장 글 싣는 순서
① 미래에셋증권 테렌스 탄 "싱가포르는 인도와 동남아 잇는 투자 중심지, ‘MTS’와 ‘디지털자산’으로 새 시대 준비"
②NH투자증권 권기정 "싱가포르 무한경쟁 속 생존 방정식, '농협' 정체성 담은 기후펀드에서 길 찾는다"
③한화자산운용 이태명·한화투자증권 이상원 “동남아 비상장·디지털자산 시장 겨냥, 글로벌 '한화' 금융 시너지 키운다”
④‘지정학 피난처’ 싱가포르 아시아 부와 함께 고성장, 국내 증권사·자산운용사도 기회 찾는다
⑤삼성화재·현대해상·코리안리, 글로벌 리스크·자본 집결지 싱가포르서 '재보험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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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기정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장이 6월10일 싱가포르 'NH ARP(NH앱솔루트리턴파트너스)'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를 마친 뒤 사진을 찍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싱가포르=비즈니스포스트] “한국 금융사가 글로벌 자산운용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장 한국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2009년부터 10년 이상 싱가포르 금융시장에서 활동하다 2021년부터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 'NH ARP(NH앱솔루트리턴파트너스)'를 이끌고 있는 권기정 법인장은 한국 금융사의 차별화한 경쟁력으로 '한국 기업에 대한 접근성'을 꼽았다.
한국 기업에 대한 높은 접근성을 활용해 가장 한국적으로 사업하는 것이 싱가포르에서 한국 금융사가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자산운용업이 발달한 글로벌 금융허브로 평가된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싱가포르의 약 3배지만 자산운용 시장의 체급은 싱가포르가 크게 앞선다.
2025년 말 기준 한국의 운용자산(AUM)은 약 1조3천억 달러, 자산운용사 수는 507곳인 반면 싱가포르의 운용자산은 약 4조7천억 달러, 자산운용사 수는 1200곳 이상에 이른다.
경제 규모와 달리 자산운용 생태계의 깊이와 폭은 싱가포르가 훨씬 깊고 넓은 것인데 그만큼 싱가포르는 글로벌 운용사와 현지 운용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장이기도 하다.
권 법인장은 “동남아 현지 벤처캐피털도 운용자산이 기본 10억 달러에 이를 만큼 싱가포르에 진출한 국내 금융사와 체급 차이가 크다”며 “모든 인력을 현지화하고 충분한 시드머니를 투입할 것이 아니라면 한국 기업과 자산에 대한 접근성을 살리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필두로 한국 기업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점을 기회로 보고 있다.
권 법인장은 “영국이나 호주 기업에 투자하는 펀드로 자금을 모집하려 하면 글로벌 운용사인 블랙록이나 KKR과 비교해 강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바로 나온다”며 “한국 금융사로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한국 기업과 자산에 대한 높은 이해도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처럼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 관심도가 높았던 적은 드물다”며 “우리 펀드가 한국 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과거 헤지펀드나 벤처캐피털(VC) 펀드에 투자하는 재간접 투자 중심으로 운용됐다.
하지만 권 법인장 부임 후에는 만기가 남은 펀드를 제외하고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한국 기업 일부, 인도 비상장 기업, 사모대출 등에 직접투자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바꿨다.
현재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4개 펀드를 통해 원화 기준 약 2600억 원을 운용하고 있다. NH농협의 자금을 동남아시아 유망 투자처와 연결하는 것이 핵심 역할이다.
하지만 권 법인장은 NH농협 자금에서 벗어나 향후 현지 투자자 자금을 끌어들여 투자 영역을 넓힐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권 법인장은 하반기 2억 달러 규모로 조성 중인 기후기술펀드(CTF·Climate Technology Fund)를 그 계획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기후기술펀드는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 기반 기후기술 기업들이 동남아시아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임팩트 펀드다. △신재생에너지 △저탄소 교통수단 △농업기술 △폐기물관리 등 한국 기업이 강점을 지닌 4개 분야에 집중 투자한다.
앵커 투자자로 국제연합(UN) 산하의 녹색기후기금(GCF, Green Climate Fund)가 42% 투자하고 농협금융그룹도 10% 이상을 출자한다. 특히 녹색기후기금 출자분은 손실 위험을 일부 흡수하는 양허성 자금으로 민간 투자자의 참여 부담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이 그동안 NH농협에서 투자받은 자금을 굴리는 형태였다면 이번 기후기술펀드는 의미 있는 글로벌 자금을 자체 모집해 활용하는 셈이다.
기후기술펀드는 한국 기업 중심 펀드 조성 전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권 법인장은 “지금까지는 한국 기업들을 펀드에 일부 편입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기후기술펀드를 통해 한국 기업에 대한 해외 자금의 관심도를 확인할 것”이라며 “이번 펀드 성과를 보고 향후 한국 기업으로만 구성된 펀드 전략을 구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권 법인장은 이 펀드를 능동적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대응하는 펀드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동남아시아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극심한 폭염 탓에 작물이 타버려 이모작이 실패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이는 농가 가계소득 타격은 물론 식량 안보와도 연결되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NH투자증권의 뿌리는 결국 농민을 위한 기본 단체인 ‘농협’에 있지 않느냐”며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 농가의 지속 가능성을 높여줄 농업 기술 관련 투자 기회를 선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법인장은 9월 말까지 1차 펀딩 목표액인 8800만 달러를 모집하고 11월부터 본격적으로 펀드를 운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타트업부터 상장기업까지 투자 대상을 열어둔 탄력적 운용 구조 덕분에 현지 벤처캐피털과 기관투자자들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 ▲ 권기정 법인장이 6월10일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에서 비즈니스포스트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권 법인장이 주목하는 또 다른 성장 동력은 사모대출(Private Credit)이다. 사모대출은 은행이 아니라 사모펀드·자산운용사 같은 비은행 기관이 비공개로 기업에 직접 빌려주는 대출을 뜻한다.
권 법인장은 "최근 미국 사모대출 시장에서 과열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동남아시아 사모대출 시장 규모는 미국의 5% 미만에 불과한 데다 가파른 경제 성장세를 고려하면 잠재력이 높다"고 바라봤다.
이어 “동남아 현지 은행들은 리스크 관리를 이유로 신용도가 높은 우량 중소기업 위주로만 대출을 집행한다”며 “대출 수요는 넘치는데 이를 공급자는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이같은 금융 공백을 파고들어 담보가 있는 사모대출 투자 실적을 쌓아왔다. 현재까지 6건의 성공적인 사모대출 엑시트(투자금 회수)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권 법인장은 “3년 안에 동남아 기업 대상 사모대출만을 전문으로 하는 펀드를 결성할 계획”이라며 “동남아 사모대출 시장은 아직 전통 강자가 없는 시장이라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동남아 사모대출 시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플레이어는 현지 핀테크 대출 플랫폼 기업들이다.
권 법인장은 "동남아는 전통 금융권의 개인금융 서비스가 제한적이라 핀테크 대출 플랫폼이 발달했다"며 "은행 계좌가 없는 인구 비중이 높아 핀테크 기업들은 쇼피, 라자다 등 이커머스 플랫폼의 전자지갑을 통해 대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는 "핀테크 기업들은 수신 기능이 없어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데 동남아 채권시장은 성숙하지 않아 사모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며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리스크(위험) 스코어링 시스템, 대출 회수 능력, 부실률 관리 능력이 검증된 핀테크 기업들에게 대출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NH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핀테크 대출 플랫폼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일찍이 싱가포르 핀테크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한국계 금융회사로서는 첫 사례로, 현지 투자업계에서도 의미 있는 선례로 평가받았다.
권 법인장은 “느리더라도 점진적으로 투자 영역을 넓혀갈 때 보람을 느낀다”며 “동남아 시장에서 한국계 금융회사로서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우겠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