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 10월30일 밤 서울 강남구에서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 무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젠슨황 엔비디아 CEO가 관람객들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연초부터 증시가 사상 최고가를 잇달아 경신하며 달아오르고 있다.
국내 증시 상승을 이끈 섹터는 단연 반도체다. 반도체 가운데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지난해 4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93조원, 20조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2.7%, 208.2% 증가했다.
4분기 영업이익 20조 원은 삼성전자 역대 최고치이자, 국내 기업 전체로도 최대 기록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3분기(영업이익 17조5천700억원) 이후 7년여 만에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이 같은 '깜짝 실적'은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범용 메모리반도체 가격 급등에 따른 것이다.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서버용 D램 가격은 전분기 대비 최대 75%, 서버용 낸드플래시 가격은 50% 상승한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DS) 영업이익은 16조 원 안팎으로 역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은 올해 메모리 가격 상승세가 지속하며 삼성전자 반도체 영업이익이 100조 원을 넘어서고, 내년에는 200조 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AI 투자 열풍과 함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그야말로 초호황 국면에 진입했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에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위기'라는 말은 온데 간데 없이 쏙 들어갔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 안팎에선 반도체 위기감이 팽배했다.
삼성전자의 2023년 반도체 부문 적자는 15조 원에 달했다. 이후 메모리 사업은 나아졌지만, 파운드리와 시스템LSI 사업부는 지난해에도 2조원이 훨씬 넘는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는 1990년대 초반부터 30년 이상 압도적 기술력으로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제패해왔다. 하지만 2024년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력에서 경쟁사에 뒤처지기 시작하더니, 10나노 D램 기술력에서도 ‘세계 최초’ 타이틀을 경쟁사에 넘겨주는 수모를 당했다.
파운드리 3나노 첨단 공정은 수율과 발열 개선에 실패해 사장됐고, 모바일 프로세서(AP) 등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이렇다 할 기술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난 5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스에서 열린 ‘CES 2026’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컴퓨팅 수요는 매년 10배씩 증가하고 있지만, 무어의 법칙은 크게 둔화됐다"고 말했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의 창업자 고든 무어의 이름을 딴 것으로, 반도체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 수가 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나고, 성능도 2배가 된다는 법칙이다.
황 CEO는 이같은 무어의법칙이 최근 반도체 집적도 한계로 더 이상 들어맞지 않게 됐으며, 앞으로 컴퓨팅 성능을 높이려면 CPU, GPU, HBM 등 모든 반도체 부문이 공동 설계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30여년 간 앞선 메모리 기술력으로 주기적으로 메모리 집적도와 성능을 높이며 세계 메모리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사장은 당시 무어의법칙을 넘어, 1년마다 메모리 반도체의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황의법칙’까지 만들며 승승장구했다.
이처럼 과거엔 고집적 고성능 메모리를 설계해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삼성 반도체는 신화를 일궜다. 하지만 최근엔 이같은 붕어빵 전략이 통하지 않게 됐다. AI 시대에 접어들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초고성능 메모리가 필요하게 됐고, 더 이상 트랜지스터 집적도만 높인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이른바 AI반도체용 메모리라 불리는 HBM은 고집적 기술뿐 아니라 얇은 D램 다이를 수십 층 쌓아야 하고, 여기에 로직 시스템반도체까지 붙여서 만들어야 하는 기술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 ▲ 지난해 열린 '반도체대전(SEDEX) 2025'에서 공개된 삼성전자의 6세대 HBM4와 5세대 HBM3E 샘플. <연합뉴스> |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위기는 지난해 4분기부터 시작된 공급 부족에 따른 일반 범용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가격의 급등에 따라 잠깐 묻힌 것일 뿐, 끝난 게 아니다. 삼성전자는 운 좋게도 시황 개선에 따라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의 시간을 번 것일 뿐이다.
2024년부터 불기 시작한 AI 인프라 투자 열풍은 아직 초기 단계로 당분간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경쟁은 지속될 것이다. 아직은 ‘AI 투자 거품’을 거론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그러나 향후 2~3년 내 인프라 투자 경쟁은 멈출 것이고, AI는 본격적 시장 확산에 앞서 마치 전기차처럼 ‘캐즘’(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앞서 잠시 정체를 겪는 현상) 시기를 겪을 것이다.
AI 투자 경쟁이 멈추면 반도체 초호황은 금새 극심한 불황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 때 초격차 반도체 기술력이 없다면 삼성전자 반도체 아성은 또다시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현재 범용 D램은 조만간 중국이 우리나라를 능가할 것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가 이미 DDR5 D램을 대량 양산하고 있고, HBM3까지 만들고 있다.
창신메모리의 세계 D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이지만, 올해 10%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불과 2~3년 뒤에는 중국의 저가 D램 범람으로 범용 D램 시장에서 누려왔던 한국의 지위는 큰 위기에 처할 것이다.
메모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국은 ‘반도체 굴기’ 정책에 따라 파운드리 기술력과 설비능력을 매년 크게 늘리며, 파운드리 2위인 삼성전자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모든 제조업 분야가 중국에 뒤지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반도체만 중국에 앞서 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이마저도 머지않아 중국에 아성을 넘겨줘야 할 판이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대표 반도체 기업이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몰락은 곧 삼성의 몰락이자, 대한민국 산업의 몰락을 의미할 수 있다.
지금의 메모리 초호황 잔치가 끝나면 엄혹한 현실이 찾아올 것이다. 그 때도 삼성전자가 초격차 반도체 기술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한국 반도체 신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처할 것이다. 삼성전자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김승용 산업&IT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