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자국 전략산업 육성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여전히 제도화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국가전략산업의 국내 생산 기반을 강화한다는 데 이견은 없지만 구체적 기준과 적용 범위 마련이 지연되고 있다. 정부는 통상 마찰과 세수 감소 우려를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고수하면서 입법 논의는 내년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 이재명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보면 정태호·진성준·김태년·안도걸·정일영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 등이 각각 국가전략산업 지원을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지난달 30일 상임위원회 심사를 거쳐 '대안 반영 폐기'됐다.
대안 반영 폐기는 상임위의 심사 결과 해당 의안의 내용을 일부 또는 전부 반영한 위원회 대안을 새로 제안하고 애초 발의안을 폐기하기로 의결하는 것이다.
해당 법안들은 국가전략사업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는 기업에 생산 비용의 일부를 소득세나 법인세에서 공제해 주는 등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을 뼈대로 한다. 이에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라고 불린다.
IRA는 2022년 미국에서 발효된 법으로 인플레이션 완화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청정에너지(전기차, 재생에너지 등) 투자 확대 및 세제 혜택 등을 통해 미국 내 전략산업 경쟁력 강화와 에너지 자립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으로 김태년 의원은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국가전략산업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면 2035년까지 생산 비용의 15%를 소득세나 법인세에서 공제해 주는 내용을 담았다. 정태호 의원은 이 같은 세액공제 비율을 20%로 규정한 법안을 냈다. 김상훈 의원은 국가전략산업을 대상으로 국내 생산량 기반의 세액공제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대안에는 국가전략산업 제품의 국내 생산 촉진을 위헤 세제 지원을 한다는 내용이 모두 빠졌다.
국가전략산업은 공급망 안정화와 경제 성장, 경제적 파급 효과 등이 매우 크다. 현재 한국에서는 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첨단 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 첨단 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인공지능, 차세대 통신, 첨단로봇·제조, 양자 등 12개 분야를 지정해 육성하고 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생산 외에 국내 판매까지 세액공제 조건으로 두는 부분에 여야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국내 판매분에 한정해 세액공제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은석 국민의힘 의원도 같은 의견을 냈다. 반면 김은혜·김상훈·윤영석 등 국민의힘 의원은 국내 판매분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세액공제 조건으로 '국내 판매'라는 조건이 붙으면 기업이 받는 혜택이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인공지능(AI) 반도체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사실상 국내 생산량 전부를 수출하고 있다. 해외에 판매되고 있기 때문에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HBM을 국내에서 생산해도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주요국들은 이미 전략산업의 국내 생산을 유도하기 위한 세제 지원책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조 바이든 행정부 때였던 2022년 IRA를 시행했다. 북미에서 최종 조립한 전기차 1대당 최대 7500달러(약 1100만 원)를 세액공제해주고 배터리 등 첨단 제조 기술 제품을 미국에서 생산·판매한 기업에도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 업계에서는 관련 기술에 대한 투자와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기조는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이어졌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기존 IRA의 틀을 유지하되 중국산 배터리·광물 배제 원칙을 더욱 강력하게 제도화했다. 여기에 기존 우려대상외국법인(FEOC) 규정은 금지대상외국법인(PFE)으로 재편되며 수출 장벽을 높였다. 중국 자본 지분율 25% 이상 기업들은 PFE로 지정돼 미국 내 공급망에 사실상 참여할 수 없게 된다.
▲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본부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은 환경 및 추적성 규제를 통해 자국 산업 보호와 함께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대표적 수단으로 핵심원자재법(CRMA)과 영국-유럽 무역협정(TCA)이 꼽힌다.
CRMA는 현지 생산을 요구하면서 배터리 등 제조업 영향력이 상당한 중국을 견제하는 성격이 짙어 '유럽판 IRA'로도 불린다. 2030년까지 니켈, 리튬, 흑연 등 배터리 산업에서 활발히 쓰이는 광물들이 포함된 전략 원자재를 EU 내에서 10% 이상 채굴, 40% 이상 정제·가공, 25% 이상 EU 내에서 재활용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특정 제3국에 대한 수입 의존도는 EU 연간 소비량의 65% 이하로 제한한다.
TCA는 2027년부터 전기차 부품의 EU·영국산 비중이 65%에 못 미칠 경우 상호 교역에 10% 관세를 적용하는 조항을 포함한다.
앞서 국내 산업계는 한국판 IRA 도입을 기대했다. 한국판 IRA 도입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7월17일 국회 기재위에서 열린 자신의 인사청문회에서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한국판 IRA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제조업 공동화는 국내 제조업이 해외 이전·수입 대체 등으로 비중이 줄어 산업기반이 약화 되는 현상을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제도 도입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보조금 성격의 혜택으로 인한 통상 마찰과 세수 감소 등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것도 기재부가 반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실제 정부가 7월 말 발표한 이재명 정부의 첫 세제 개편안에도 한국판 IRA는 담기지 않았다. 세수 감소와 세계무역기구(WTO) 보조금 협정 위반 등 통상 마찰로 번질 가능성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올해 국가별무역장벽보고서(NTE)를 통해 무역장벽 유형 가운데 하나로 보조금을 꼽기도 했다.
기재부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세액공제에 대한 환급제도를 도입할 경우 서민, 농민, 중소기업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세제 지원과 관련해 동일한 요구가 제기될 우려가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기재위 전문위원실에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한국판 IRA의 연내 입법화는 사실상 물건너 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제 주무 부처인 기재부도 국회에 사실상 연내 입법화가 어렵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재부는 의견서에서 첨단산업 국내 생산 세액공제 도입에 대해 "연구용역을 발주한 상황"이라며 "올해 말 연구용역 종료 시 해당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 도입 여부, 공제 대상 등을 설정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국회 차원의 입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다시 3대 특검 수사와 사법개혁을 둘러싸고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전날인 9일 정기국회 마지막 날에 모든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벌이기도 했다.
김태년 의원실 관계자는 이날 비즈니스포스트와 나눈 통화에서 한국판 IRA 법안의 진행 상황에 대해 "아직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