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는 부문장급 이상과 법무실장 등 이른바 '실세' 구실을 할 수 있는 임원 자리 인사 때는 이사회 심의 및 의결을 거치도록 이사회 규정을 바꿨고, 노조는 차기 CEO 선임 절차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경영권 침해' 주장이 나온다.
▲ KT 차기 CEO 선임 절차가 시작된 가운데, 이사회와 노조가 앞다퉈 '경영권 침해' 지적 행보에 나서 주목된다. 사진은 서울 광화문 KT 사옥. <연합뉴스>
반면 이제야 '낙하산 CEO' 인사 전횡 견제 시스템이 작동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는 분석도 나온다.
KT는 2002년 민영화 당시 설계된 대로 '국민기업' 모양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상태에선 이사회가 경영진 견제 구실을 하고, 이게 잘 이뤄지고 있는지를 노조가 감시하는 시스템이 잘 작동돼야 한다. 이사회와 노조 중 한 곳이라도 제구실을 못하면 낙하산 CEO, CEO의 인사 전횡, 이사회와 노조의 직무 유기 내지 도덕적 해이 등을 부를 수 있다.
KT 민영화 이후 23년 동안 이미 수없이 자행됐거나 보여진 모습이기도 하다.
KT 노조는 지난 12일 성명을 내어 "KT는 대한민국 통신 인프라를 책임지고 국민의 일상과 직결된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이라며 "노조가 차기 CEO 선임 절차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KT 차기 CEO는 외풍으로부터 자유롭고 통신의 전문성과 경영능력을 겸비해야 하며, 국민기업 KT의 본분을 깊이 이해하고 구성원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선임되어야 한다”며, 투명한 선임을 차기 CEO 선임 절차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줄 것을 제안했다.
이어 "CEO 선임 절차는 누가 봐도 투명해야 하며 낙하산 인사는 결단코 용납할 수 없다. 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정치권과 외부 세력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또 “최근 네트워크 보안 해킹 사태 등 일련의 문제는 KT의 근간인 통신 본연의 기술력과 내부통제 시스템이 등한시된 결과다. 또다시 KT의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 선임된다면 내부 기반은 더욱 약화될 것”이라고 짚었다.
그동안 CEO 자격 및 선임 절차와 관련해, 새노조(제2노조)는 여러 주장과 비평을 내놨으나, 대다수 직원들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는 제1 노조가 CEO 자격 및 선임 절차와 관련해 사전에 목소리를 낸 것은 사실상 민영화 이후 처음이다.
평가가 엇갈린다.
우선 "노조가 경영에 관여하려고 한다", "전임 이석채 회장이 KT 재산을 다 팔아먹을 때는 찍 소리도 못하더니"라는 비판이 나온다.
반면 "노조가 드디어 이사회 행태를 감시하고 나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서 KT 이사회는 지난 4일 핵심 임원 인사와 조직 개편 시 이사회 심의와 의결을 받도록 이사회 규정을 바꿨다. 사전 심의·의결 인사 대상으로는 부문장급 이상과 법무실장을 꼽았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이사회가 경영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CEO 고유 권한인 임직원 인사권을 제한하는 처사란 비판이 나온다.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려워지고, CEO 책임경영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KT 임원 출신의 한영도 지속경영연구원장(전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은 “경영 목표 달성을 위해 조직을 개편하고, 개편된 조직에 맞춰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는 것은 대표이사 고유 권한”이라며 “이를 사외이사들이 대신 행사하겠다는 것은 월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며 CEO 교체 때마다 반복돼온 낙하산 인사에 따른 경영 불안정 구조를 차단하기 위한 견제 장치가 마련되려고 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서 KT에선 CEO 교체 때마다, 새 CEO가 경영 보좌 전문가 영입을 이유로 외부 인사를 불러들여 핵심 자리에 앉혀 실세 구실을 하게 만들고, 임기가 끝나 새 CEO가 선임되면 '올레 KT'(CEO가 밖에서 데려온 임원들을 가리키는 말, KT 출신 임원은 '원래 KT'로 불린다)들을 다 내보내고 그 자리를 자신의 지인들을 불러들여 채우는 악순환이 반복돼왔다. 그 과정서 경영의 일관성은 무너지고, 이미 진행된 투자가 엎어지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김영섭 사장에서 차기 CEO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 사장 취임 뒤 '이명박 정부 라인'과 LGCNS 출신 등으로 꼽히는 인사들이 대거 영입돼 실세 행세를 해왔는데, 새 CEO가 이들을 정리하고, 이들이 벌여놓은 투자를 '사업성 부족' 등을 이유로 엎을 수 있다는 것이다.
KT 전직 임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전례를 보면, 낙하산 CEO가 친정(전 직장)이나 자신을 CEO로 밀어준 정치권 등의 추천을 받은 인사를 핵심 자리에 앉히고, 그가 실세로 행세하며 전횡을 휘두르는 사례가 많았지만, 이사회가 견제하지 못했다"고 짚었다.
KT(민영화 전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는 2002년 국민주 공모 방식으로 민영화됐다.
당시 일각에선 삼성과 현대차 등 이동전화 사업권 쟁탈전에서 밀려 통신서비스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재벌들이 '주인 없는' KT의 경영권을 노릴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기도 했었으나, 지금까지는 당시 짜여진 지배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1대 주주로 올라서긴 했으니, 단순 투자 형태라 경영권 행사를 하지는 않고 있다.
KT 민영화를 주도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담당자는 당시 기자들에게 "지배구조로 보면 SK텔레콤은 SK그룹, LG텔레콤(지금은 LG유플러스)은 LG그룹의 통신사 아니냐. 두 회사가 그룹 오너 이익을 거스르며 우리나라 통신서비스 발전과 이용자 권익에 앞장설 수 있겠냐. KT가 민영화 뒤에도 국가 통신사 구실을 해주길 바라면서 국민기업 형태로 민영화를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도 정부나 정치권 쪽의 낙하산 CEO 내려보내기와 'KT에 빨대 꽂기' 등이 성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KT가 민영화돼도 진정한 민간기업으로 거듭나 정부와 정치권 입김에서 벗어나려면 30년 이상 걸린다(한국전력 통신사업 총괄 임원)는 비아냥도 있었다.
이런 우려에 대해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이사회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통신 전문가들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낙하산 CEO와 그의 독단적 경영 등을 견제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노조가 조합원 권익을 보호하고 일터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이사회가 경영진 전횡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를 감시해야 한다고 짚었다. 과기정통부의 한 국장은 기자들에게 "경영진, 이사회, 노조 등 3개 다리가 굳건히 자기 역할을 해줘야 솥이(KT 경영이) 바로 설 수 있다"며 "만약 하나라도 제구실을 못하거나 안하면 KT는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동안 KT에선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그 결과 CEO 입맛에 맞는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경우가 많았고, 정치권 출신 인사가 낙하산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정권이 바뀌고 새 CEO가 선임될 때마다 '전 정권 출신 내지 전 CEO가 밀어넣은 사외이사들이 KT를 장악하고 있다'는 식의 공격이 반복됐다.
이사회가 낙하산 CEO를 막아내는데 앞장서기는 커녕 정치권의 눈치를 살펴 알아서 '카펫'을 깔아주는 경우도 발생했다. 정치권 눈치를 살펴 자격이 안되는 사람을 차기 CEO로 선임하기 위해 규정을 바꾸고, 바뀐 규정을 소급 적용하는 경우까지 벌어졌다.
유능한 CEO가 선임될 리 만무했다. 통신 문외한을 CEO로 선임하고, 그 CEO를 둔덕삼아 사외이사직을 연임하는 도덕적 해이도 발생했다.
지금도 이사회 구성원의 자질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 김영섭 KT 사장이 10월29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감에 출석해 의원들의 해킹 및 무단 소액결제 사태 관련 질의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KT는 망가졌다.
차별화된 통신망으로 통신서비스 생태계를 키우고 활성화하며, 새로운 기술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본분을 잊었다. 일터로써의 KT도 쪼그라들었다.
통신을 모르고, KT의 본분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CEO로 선임되다 보니, 잘 모르는 통신 본연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탈통신'과 곶감 빼먹기(전화국 부지를 아파트나 호텔로 개발)에 치중한 결과이다.
그 결과 통신구 화재에 대응하지 못해 통신망 장애 피해를 키우고, 통신망에 유령(불법) 기지국이 득실대며, 통신망이 뚫려 가입자들이 무단 소액결제 피해를 당하는 등의 사태가 이어졌다.
노조 역시 침묵했다.
조합원들이 '노조가 회사의 인력 구조조정에 힘을 실어주며 조합원들의 권익을 방치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에 나서기도 했다.
KT 임직원은 한때 6만8천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2만 명도 안된다. 인력 구조조정과 외주화가 상시적으로 벌어진 결과이다.
희망퇴직을 가장한 '사실상 강제로 내보내기'와 경영 합리화를 명분으로 한 외주화가 상시적으로 이어졌다. 부부 사원 중 한 명은 나가도록 해 가정 불화를 일으키고, 안 나간다고 버티면 집 출퇴근이 불가능한 격오지로 발령내거나 사무실에서 일하던 여성 직원을 통신구에 들어가거나 전봇대에 오르게 하기도 했다.
김영섭 사장 취임 뒤에는 지사와 지점을 인적·물적 분할 방식으로 정리해 자회사로 내보내는 형태의 구조조정까지 추진됐다. 수천명이 정리됐고, 안 나가겠다고 버티는 2천여 명은 일하던 지사·지점에서 떨려나 격오지 현장을 전전하고 있다.
KT 전·현직 임직원들이 요즘 울고 웃으며 보는 드라마가 있다고 한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란다. 드라마 배경이 KT와 같고, 드라마 속 에피소드가 KT에서 실제 있었고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들이라서란다.
한 직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만나 "KT 직원 쪽에서 보면 일터이자 생활 기반이 사라지거나 무너져내리고 있는 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는 이를 막아서기보다, 오히려 회사의 상시 구조조정에 협조하는 행태까지 보였다.
지난 16일 법원 발표를 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재판장 최누림)는 KT 노조 조합원 189명이 노조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노조가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회사가 인력 구조조정을 위해 진행한 특별희망퇴직에 합의한 것은 '불법행위'라며, 조합원 1인당 50만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KT 노조가 조합원 총회를 거치지 않은 채 회사와 특별희망퇴직에 합의한 행위는 조합원들의 단결권과 노조의 의사 형성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라고 밝혔다.
앞서 KT는 지난해 통신망 설계·유지보수 업무를 자회사 두 곳(현 KT넷코어·KT피앤엠)에 넘기는 구조조정 계획을 세웠다. 회사는 자회사로 전출하지 않고 잔류하는 인력을 영업직군으로 전환배치하기로 하는 한편, 노조와 특별 희망퇴직 시행을 합의했다.
KT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뤄져왔다면, 이사회와 노조의 행보에 '경영권 침해' 같은 부정적 평가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KT 안팎에선 오히려 '투명 경영' 기대감이 퍼지는 모습이다.
"지금은 경영학 교과서를 잣대로 바람직한 방향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음지에서 이뤄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내 공론화가 이뤄지게 하는 게 먼저다. 침묵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이사회와 노조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KT의 한 팀장급 직원이 전해준 "내부 분위기"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