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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레시피] 보통의 가족과 딜리셔스, 중산층 가정의 균열과 몰락

이현경 muninare@empas.com 2025-03-19 15: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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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 레시피] 보통의 가족과 딜리셔스, 중산층 가정의 균열과 몰락
▲ 최근 중산층 가정의 위선을 다룬 영화에서는 악의와 선의의 경계가 참담할 정도로 뭉개져버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보통의 가족'의 한 장면. <네이버영화 예고편 저장소>
[비즈니스포스트] 2000년을 전후하여 중산층 가정의 허울과 위선을 다룬 영화들이 할리우드는 물론 한국에도 다수 등장했다. 이전에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기말이라는 특수한 배경 덕에 어느 때보다도 암울하고 도발적인 서사가 펼쳐졌다. 

이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가장 어두운 가정 드라마 두 편을 꼽자면, <아이스 스톰>(리안, 1998)과 <아메리칸 뷰티>(샘 멘더스, 2000)를 들 수 있다. 한국 영화로는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3)이 있다. 이들 영화는 모두 안정적인 직장과 사회적 지위, 경제력을 갖춘 주인공들이 꾸려가는 가정을 파고드는 균열과 이로 인한 파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스 스톰>은 <헐크>(2003)와 더불어 리안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어두운 계보에 속한다. 두 편 다 가정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마블코믹스 캐릭터 ‘헐크’가 등장하는 <헐크>에 비해 <아이스 스톰>은 1970년대 미국 사회를 지극히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교외에 자리한 값비싼 저택에 이웃한 두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어른들의 외도와 아이들의 불장난이 파국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을 차갑게 그려낸다. 

<아메리칸 뷰티>는 그야말로 세기말 미국 가정의 혼동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흥행과 비평에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 소위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온갖 에피소드를 통해 이념과 도덕적 정체성을 잃은 인물들의 방황을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 한 <아이스 스톰>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는 200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5개상을 휩쓸 정도로 화제작이었다.  

세기가 바뀌고도 20년이 더 지났다. 세기가 바뀌었어도 무덤덤했던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즈음 중산층 가정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두 편의 영화에 담긴 뉴노멀 시대 징후를 짚어보고자 한다. 멜로가 본령인 허진호 감독이 처음으로 선보인 스릴러 <보통의 가족>(2024)은 2009년 출간된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가 원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영화화되었다. 

변호사인 재완(설경구)과 의사인 재규(장동건)는 형제로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형 로펌 대표인 재완은 부도덕한 재벌 아들을 변호해 주고 거액을 받는 인물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지수(수현)와 재혼해 살고 있다.

재규는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다닐 정도로 돈보다는 인술을 중시하는 의사이고 아내인 연경(김희애)도 남편의 명성에 걸맞은 인품과 교양을 지니고 있다. 연경은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집에서 간병하면서 고3 수험생 딸을 챙기고 남편과 해외 봉사활동까지 다닐 정도로 야무지고 성실한 주부다.

재완의 아들과 재규의 딸이 범죄에 연루되면서 이 집안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절대적 악 같은 것은 없다. 다만 내 가정과 내 자식이 위기에 몰렸을 때 선하고 교양 있는 부모의 도덕성은 심판대에 오른다. 20여 년 전, 세기말 중산층 가족의 허위와 해체를 다룬 영화들은 자극적이지만 혼란의 원인이 분명했다면 지금 언급하는 두 편은 악의와 선의의 경계가 참담할 정도로 뭉개져버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딜리셔스>(넬레 뮐러-슈퇴펜, 2025)는 넷플릭스 제작 독일 영화다. ‘딜리셔스’란 동명의 영화가 여러 편 있는데 제목답게 대부분 요리 관련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번 살펴 볼 <딜리셔스>는 요리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은 아니라는 사실에 섬뜩해진다. 

독일인 에스터와 욘 부부는 청소년 아들과 딸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난다. 행선지는 에스터 부모님의 별장이 있는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이들 가족은 매년 이곳으로 휴가를 오곤 했다. 화려하고 고상하게 치장된 호화 별장에 도착한 가족은 동네에서 가장 고급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해 저녁 식사를 한다. 식사 중 가볍게 칵테일을 마신 욘은 별 생각 없이 별장으로 운전을 하던 중 사고를 낸다. 

욘의 차에 치인 테오도라를 집으로 데려 온 에스터는 가벼운 부상이니 적당히 처치를 한 후 위로금을 주어 일을 무마할 요량이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에스터나 대학교수인 욘은 모두 사회적 명망이 있는 인사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갔던 테오도라는 다음날 별장을 찾아와 뜻밖의 제안을 한다. 

테오도라는 부상으로 일자리를 잃었으니 휴가 동안 별장 하녀로 고용해 달라는 협박 같은 부탁을 한다. 결국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고 이때부터 부부와 두 아이는 테오도라의 능수능란한 계략에 점차 빠져든다.

사실적인 스타일로 잔잔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결말에 급작스레 호러로 장르 변경이 된다. 불만과 외로움을 풍요로 포장한 가족 개개인을 내파시키는 테오도라는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타자’의 상징이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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