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마음] 한가위에 풍성하지 않으면 어때요

▲ 추석을 열흘 앞둔 26일 광주 서구 상무금요시장에서 시민들이 차례상 차림 장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즐거우라고 판을 깔아주는 날이 과연 정말 즐거운 날일까? 혹시 그 반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건 정신과 의사로 일하면서부터다.

생일, 크리스마스, 추석과 설, 가정의 달, 연애 'n주년' 등등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념일이 있다. 사람들은 생일에 “행복한 하루가 되라”며 축하하고, 추석이면 “풍성한 한가위가 되라”고 덕담한다.

그 말에 잘못은 없다. 나 역시 비슷한 덕담을 건넨다. 그런데 실제로는 기념일을 다른 평범한 날보다 더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이유는 다양하다. 

가만히 각자의 경험을 되짚어보자.

기념일은 늘 즐겁고 풍요로웠는가? 아니면 기대와 현실의 간극 때문에 허전했는가? 함께할 이가 없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는가? 아니면 연락을 피하고 싶던 누군가에게 억지로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 답답했던 적이 있는가?

이런 경험이 전혀 없다면 정말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크고 작은 강도로 한두 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라는 데에 조심스럽게 500원을 걸고 싶다. 

미국 드라마 속 추수감사절 장면을 떠올려보자. 혼자 지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주인공을 어떻게든 초대해 풍성한 음식과 가족의 온기를 제공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명절에 가족끼리 모이지 않으면 어쩐지 어색하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만나지 않고 혼자 있는 사람은 명절이라는 배경 속에서 갑자기 허전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혹시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너무나 다행이고.

어떤 이에게는 소원하던 부모님을 찾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깊은 갈등에 빠지는 날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가족 친척과 모이지만 정작 평소에는 아무 교류도 없는 이들과 마주않고 있어 어색하다.

“공부는 잘 하니?”, “취직은 했니?” 같은 질문도 사실은 대화의 빈틈을 메우려는 한국식 애씀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색함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재산 문제, 그간 쌓여온 감정이 폭발하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무난한 명절이다.

거기에 명절은 여전히 성별 고정관념이 드러나는 시기다. 차례상을 차리고 치우는 육체적 노동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부당함과 굴욕이다.

물론 명절의 희망편도 분명 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반갑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 흐뭇하며, 일과 학업에서 벗어나 쉴 수 있어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절은 결코 순수히 그것들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상적인 명절의 모습’이라는 이데아가 있고, 그 이상에 닿지 못하면 때로는 결핍처럼 느끼기도 한다.

해외에서도 기념일이 불러오는 복잡한 감정을 '할러데이 블루(holiday blues, 휴일 우울감)”라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명절증후군’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이는 주로 가족 중심 문화와 성역할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의미는 약간 다르다.

이렇듯 혼자면 혼자라서, 함께면 함께라서, 좋기도 하지만 분명히 꽤나 껄끄럽기도 한 것이 명절이다. 

추석에 걸맞는 덕담을 건네도 모자랄 판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정신의학 용어 중 보편화(universaliz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각자의 부정적 감정을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보편적 차원에서 이해할 때 심리적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명절의 즐거움과 불편함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나 소외감은 다소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

우리가 명절을 대하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는 ‘풍성해야 한다’는 명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지나친 기대나 비장한 각오 없이, 명절이 가져다주는 시끄러움도 허전함도 삶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상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명절을 지혜롭게 보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