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국민건강보험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 주요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담배소송) 항소심의 법원 판결을 앞두고 국내외 주요 단체의 지지에 힘을 얻고 있다.

40여 년의 경력의 호흡기내과 전문의인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담배소송 1심 패소를 딛고 이번 항소심에서 한발 전진한 판결을 받아낼 수 있을지 관심이 몰린다.
 
건보공단 담배 소송 항소심 판결 앞둬, 정기석 흡연 따른 재정누수 줄일 기반 만들까

▲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건보공단 담배회사 상대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12차 변론기일에 출석하면서 취재진 질문에 응하고 있다. <연합뉴스>


13일 건보공단에 따르면 담배소송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국내외 전문가들과 담배 소비자들의 지지 연대를 이끌어내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건보공단이 지난 11~12일 개최한 '2025년 국민건강보험 글로벌 포럼'에서 벤 맥그래디 세계보건기구(WHO) 건강증진부 공중보건법 및 정책 부문 책임자는 기조연설을 통해 “국제 담배 규제 원칙과 회원국의 책무를 강조하며 한국의 담배소송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함께 나아가야한다”고 말했다.

닐 슐루거 미국 뉴욕 의과대학 학장은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폐암 발병률이 25배 높다’는 데이터와 미국 담배소송 승소 사례를 소개하며 “미국 역시 법원이 과학에 기초해 담배회사의 기만적 행위에 책임을 물었다”며, “흡연과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내 전문의들도 건보공단의 담배소송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대한폐암학회를 포함한 26개 암 관련 학회는 최근 "니코틴의 중독성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은폐한 담배회사는 책임을 인정하고 흡연으로 인한 폐암 환자의 치료 및 보상을 위해 적극적 의무를 다하기를 촉구한다"며 "담배소송에서 담배가 일으키는 중독과 질병에 대해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사회정의를 요구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건강권을 수호하기 위해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주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건보공단은 대표적 담배 장기 소비자인 노인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으며 연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중근 대한노인회 회장은 지난 10일 건보공단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노인세대는 오랜 기간 흡연으로 인한 건강피해가 누적되면서 더욱 치명적인 질병으로 이어지게 돼 이로 인한 의료비 증가는 사회 전체에 큰 부담이 된다"며 "건보공단이 제기한 담배소송은 국민 모두가 함께 지지해야 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또한 “그동안 담배를 제조·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담배회사가 이제는 흡연피해 기금 조성 등으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항소심 최종 12차 변론은 지난 5월22일 진행됐다. 일반적으로 판결은 최종 변론일로부터 최소 한 달, 최장 세 달 정도 걸린다는 점에 비춰볼 때 항소심 판결이 빠르면 이번 달 나올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건보공단은 2014년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 3개사를 상대로 담배소송을 처음 제기했다. 개인이 아닌 국가기관이 담배소송의 원고로 나섰다는 점에서 담배 유행성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높였다.

건보공단은 2003~2012년 사이 30년 이상, 한해 20갑 이상 흡연한 폐암(소세포암, 편평세포암) 및 후두암(편평세포암) 환자 3465명에게 지급한 건강보험 급여비 약 533억 원을 담배회사들이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2020년 1심에서는 원고인 건보공단이 패소했다. 1심 법원은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담배회사 손을 들었고 건보공단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번 항소심에서도 담배와 질병 간 인과관계 입증 인정여부가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꼽힌다.

전문의인 정 이사장은 올해 열린 담배소송 항소심 11차 및 12차 변론에도 직접 참여해 담배와 폐암 등 호흡기 질환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의학적으로 강조하는 적극적 모습을 보였다.

정 이사장은 12차 변론에서 "2025년도에 와서도 담배의 중독성을 얘기하는 것 자체에 비애를 느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건보공단은 12차 최종 변론 전 인과성 입증에 보탬이 될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건강보험연구원과 연세대 보건대학원은 공동 연구를 통해 폐암 유전위험점수가 동일 수준이더라도 ‘30년 이상, 연 20갑 이상’ 흡연자인 경우 비흡연자에 비해 소세포폐암 발생위험이 54.49배 높고, 소세포폐암 발생에 흡연이 기여하는 정도가 98.2% 수준이라는 결과를 내놨다.

국회와 정부 모두 흡연이 초래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에 공감하고 있으며 건보공단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백종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0월 건보공단 국정감사에서 “최근 5년간 흡연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건강보험 재정에서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정부는 흡연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위험요인 등을 분석해 건강보험 재정 누수 방지에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질병관리청도 '흡연 기인 사망 및 사회경제적 부담 연구' 결과를 통해 직접흡연은 기대수명을 감소시키고 사망 위험을 증가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22년 직접흡연에 따른 사망자가 7만 2689명이고 직·간접 사회경제적 비용은 13조6316억 원으로 추산됐다.

이렇듯 건강보험 재정에서 흡연으로 인한 지출이 해마다 증가하는 가운데 건강보험 재정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한참 부족한 상황에 놓여 있다.

국민건강증진법에 의하면 ‘국민건강증진기금’은 담배 가격에 포함된 ‘국민건강증진부담금’을 재원으로 하고 있는데 국민건강증진기금에서는 매년 일정 규모의 금액을 건강보험 재정에 지원해야 한다. 

장종태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흡연으로 인해 지출되는 건강보험 급여액이 국민건강증진기금에서 건강보험 재정으로 가는 지원금보다 매년 수천억 원에서 1조 원 이상까지 많아 건강보험 재정이 큰 손실을  입고 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누적된 차액만 5조4080억 원 수준이다.

이번 담배소송에서 건보공단이 승소한다면 흡연으로 인한 진료비 부담의 일부라도 담배회사로부터 환수할 수 있어 건강증진기금과 건강보험 재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담배회사의 사회적·재정적 책임이 강화되면 건강증진기금의 인상이나 활용 방식, 담배회사 부담 구조에 대한 정책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다.

의료계와 학계는 이번 담배소송이 단순한 재정 보상을 넘어 흡연 예방 및 기업 책임 강화 등 장기적으로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건보공단 담배 소송 항소심 판결 앞둬, 정기석 흡연 따른 재정누수 줄일 기반 만들까

▲ 담배소송 12차 변론자료 중 흡연과 유전요인의 폐암 기여위험도 .<건강보험연구원>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담배회사에 대해 최종적으로 원고가 승소한 사례가 없다.

건보공단이 이번 담배소송 항소심에서 이긴다면 담배 회사가 흡연에 따른 건강 피해를 법적으로 책임지는 첫 번째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미국·캐나다 등 해외에서는 담배회사의 위법행위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다수 존재한다. 해외의 담배소송 판결 흐름은 건보공단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로 평가된다.

정기석 이사장은 국내 대표적인 호흡기내과 전문의로 재임 기간 안에 담배소송에서 유의미한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정 이사장이 2020년 1심 패소보다 진전한 판결을 받아낸다면 건보공단의 사회적 위상을 높일뿐 아니라 전문가로서의 자신의 업적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 이사장은 1983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1993년 서울대대학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부터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에서 호흡기내과 교수직 등을 맡았고 2012년 5대 한림대학교 성심병원장으로 일했다.

또한 정 이사장은 윤석열 정부 당시인 2022년8월부터 2023년5월까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코로나19특별대응단 단장을 맡았다.

정 이사장은 3월 열린 '범국민흡연폐해대책단' 자문회의에서 "그동안 협업을 통해 흡연과 암 발생의 인과관계와 담배회사의 불법행위를 항소심에서 추가로 입증했다"며 "과학적‧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담배회사들의 왜곡된 주장을 반박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