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심리학에서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끝내고 분명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지적 종결 욕구’라고 부른다. 사진은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오른쪽)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이 2025년 11월 서울 서초구 한 연습실에서 합주하는 모습.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얼마 전 가족과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가 꽂혔다. 최근에 나온 여성 아이돌 그룹의 노래인가 싶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제법 마음에 들어서 노래를 들려주면 제목과 가수를 찾아주는 음악 인식 앱을 오랜만에 켰다.
그런데 노래는 잡히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스피커 가까이 가져가 다시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어라?’ 싶었던 마음은 이때부터 약간의 오기로 변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했다. 이것만 확보하면 집에 가서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곧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거칠고 어딘가 흙냄새가 나는 듯한 기계음 위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가사를 한 단어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챗GPT와 클로드에 파일을 올려 물어보아도 해결이 안됐고 급기야 녹음본에서 목소리를 분리해주는 앱까지 받아 가족의 목소리를 지웠지만 그래도 어떤 노래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호기심은 점점 집착이 됐다. 채팅방에 녹음본을 올려 지인들에게 묻고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도 녹음 파일과 함께 장문의 문의 글을 올렸다. 글은 이렇게 끝났다.
“어느 때보다 집단지성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너무 알고 싶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 역시 각자의 방법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쯤 되자 나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노래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찾는 것일까 아니면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노래가 점점 더 좋아진 것일까?
우리 마음 안에서 호기심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알고 싶은 것 사이의 간격을 알아차릴 때 생겨난다. 답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때보다 거의 알 것 같은데 결정적인 한 조각만 빠져 있을 때 그 간격은 더욱 신경 쓰이게 된다.
내게는 녹음 파일이 있었다. 여성 가수의 목소리도 들렸고, 가사도 아주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을 듯했다. 앱 하나만 더 사용하면 다른 누군가에게 한 번만 더 물으면 곧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찾아질 듯 찾아지지 않는’ 상태가 계속해서 다음 노력을 부추겼다.
여기에 이미 들인 시간과 수고라는 매몰비용도 더해졌다. 가족의 목소리까지 지워가며 찾은 노래를 이제 와서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그렇게 처음에는 그저 괜찮았던 노래가 어느새 반드시 찾아야 하는 특별한 노래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불교 재즈’를 주제로 한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줬다. 음악이 좋아서 살펴보니 인공지능(AI)으로 만든 곡들이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들은 노래도 AI로 만든 곡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문의 글을 올렸던 곳에서도 마침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아무리 검색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악이라면 AI로 만든 곡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AI가 만든 음악도 예술인지, 창작자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고 싶지 않다.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그 설명을 접한 뒤 일어난 마음의 변화였다.
AI 음악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아니고, 노래의 제목이나 가수를 알아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허탈감이 들면서 열망이 빠르게 식었다.
나는 노래를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를 왜 찾을 수 없었는지 설명해줄 이야기를 얻은 셈이다.
심리학에서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끝내고 분명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지적 종결 욕구’라고 부른다.
사람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불안을 느낀다. 반면 설명이 생기면 그 내용이 꼭 반가운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다소 안정된다. 어디까지가 문제이고, 무엇을 예상해야 하며 어떻게 대처할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답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저 분명한 답을 원한다.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순간을 자주 만난다.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사람이 진단이나 설명을 들은 뒤 “차라리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질환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서가 아니다. 그동안 형태 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경험에 이름이 생기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일들이 하나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명이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지는 않지만, 막연한 혼란을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아무 설명이나 만들어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이 놓였다고 해서 그 설명이 옳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진실을 발견해서 안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럴듯하게 닫히는 이야기를 얻어서 안심하기도 한다. 특히 건강이나 안전처럼 중요한 문제에서는 편안한 설명보다 정확한 설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만 아직 확실한 답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만이 가장 나은 태도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알지만 그다음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누어 말해줄 수 있다. 이러한 잠정적인 설명만으로도 사람은 불확실성을 조금 더 견딜 수 있다.
그 노래가 정말 AI로 만들어졌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찾고 있지 않다.
사람은 언제나 완전한 답을 얻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마 이런 이유였을 것’이라는 잠정적인 설명만으로도 오래 붙들고 있던 것을 놓을 수 있다. 내게 AI라는 가설은 노래의 정답이라기보다 그만 찾아도 된다는 허락에 가까웠다.
삶에는 예를 들면 상대의 속마음처럼 끝내 제목을 알아낼 수 없는 노래 같은 일들이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완전한 정답만은 아닐지 모른다.
이럴 때 눈앞의 상황을 모아 내게 필요할 설명을 들려주는 시도를 한다면 그리고 그 설명이 너무 기만적인 것만 아니라면, 비록 정답을 대신하지 못하더라도 나의 마음이 머물 수 자리를 만들어줄 것이다. 반유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여성학협동과정 석사를 수료했다. 광화문에서 진료하면서, 개인이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책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