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왼쪽 네 번째)과 신동원 농심 회장(왼쪽 세 번째)이 창업주 세대의 '라면 앙금'을 뒤로하고 계열사 사이 협업 접점을 넓히고 있다. 롯데와 농심은 유통을 넘어 호텔 콘텐츠까지 협업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사진은 생성형AI 챗GPT로 만든 이미지.
[비즈니스포스트] 롯데그룹과 농심이 선대 회장 시대의 골 깊은 갈등을 뒤로 하고 손을 잡는 횟수를 늘리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신춘호 농심 명예회장은 라면사업에 대한 이견으로 수 십 년을 의절하고 살았다. 하지만 선대 회장들이 모두 영면한 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원 농심 회장 시대가 되자 오히려 사촌기업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살려 협력을 활성화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4일 롯데그룹과 농심의 최근 사업 동향을 종합하면 두 그룹의 협업 빈도가 롯데마트·슈퍼를 중심으로 한 상품 개발을 넘어 롯데호텔의 체험 콘텐츠까지 다방면에서 감지되고 있다.
협업 방식도 단순히 농심 제품을 롯데 유통망에서 판매하는 데 머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는 점포와 호텔 등 소비자 접점을 제공하고 농심은 제품 개발력과 브랜드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공동사업의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그룹 협업의 가장 최근 사례는 호텔롯데가 운영하는 라이프스타일 호텔 'L7 홍대 바이 롯데호텔'에 마련된 '너구리의 라면가게'다. 롯데호텔앤리조트는 농심과 함께 호텔 일부 공간을 너구리 브랜드 체험장으로 꾸며 2027년 7월 중순까지 운영한다.
호텔 22층 루프탑 풀에서는 농심 라면을 직접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21층 블루루프라운지에는 너구리 캐릭터와 농심 제품을 활용한 브랜드 공간을 마련해 라면을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두 회사의 접점은 최근 롯데의 유통 계열사를 중심으로 꾸준히 늘어났다.
롯데마트·슈퍼는 3월 농심의 수출 전용 제품인 '순라면'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단독 판매했다. 순라면은 미국과 유럽, 중동 등에서 판매돼 농심의 해외 라면 가운데 판매 상위권에 오른 제품이다.
2025년 4월에는 농심과 공동으로 개발한 '육수대가 우육탕면'을 유통업체 가운데 단독 출시하기도 했으며 같은해 7월에는 부산광역시까지 참여한 3자 협업으로 '농심 자갈치×부기'를 선보였다. 농심의 자갈치 과자에 부산시 캐릭터 '부기'를 넣고 롯데마트의 전국 점포와 부산 지역 축제를 통해 판매와 홍보를 진행했다.
상품 공동개발은 2024년 본격화했다.
롯데마트·슈퍼는 농심과 7개월 동안 준비한 '시원탕 꽃게탕면'을 2024년 3월 단독 출시했다. 롯데마트가 농심과 개발한 첫 단독 라면으로 포장지에는 롯데마트 전용 서체를 적용한 점이 특징이었다. 이듬해 우육탕면이 추가되면서 두 회사의 라면 협업도 한 차례 상품 기획이 아니라 후속 제품을 잇달아 내놓는 관계로 이어졌다.
롯데와 농심의 물리적 접점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2022년부터다.
농심은 2022년 5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 비건 파인다이닝 식당 '포리스트 키친'을 열었다. 농심이 미래 먹거리로 추진하던 대체육과 비건 식품을 소비자에게 직접 선보이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롯데의 핵심 상업시설이었다.
포리스트 키친은 시장환경 변화와 운영비 부담으로 2024년 12월 영업을 끝냈다. 장기간 이어진 공동사업은 아니었지만 창업주 세대의 갈등이 남아 있던 두 그룹 계열사가 같은 공간에서 사업 접점을 만든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두 그룹의 관계는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갈등의 뿌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과 동생 신춘호 명예회장은 라면사업 진출을 놓고 의견이 갈렸다. 신격호 회장은 라면사업 진출과 관련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였지만 신춘호 회장이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춘호 명예회장은 1965년 자본금 500만 원으로 롯데공업을 세워 독자적으로 라면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롯데공업은 롯데라면을 시작으로 새우깡과 농심라면, 인디안밥, 바나나킥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독자적인 식품회사로 성장했다.
롯데공업은 1978년 회사 이름을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이 담긴 농심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 상표 사용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회사 이름 변경의 배경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는데 이 사건 이후 형제의 왕래는 끊겼다.
롯데마트는 2010년 1월 한국야쿠르트에 생산을 맡긴 자체브랜드(PB) 상품 '롯데라면'을 출시했다. 농심 창업주인 신춘호 농심 명예회장이 세운 롯데공업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사용했던 제품명을 37년 만에 다시 꺼낸 것이다.
롯데라면은 애초 롯데마트 전용상품으로 기획됐지만 롯데백화점과 롯데슈퍼, 세븐일레븐, 롯데닷컴 등 그룹 유통망으로 판매처가 확대됐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 이름을 붙인 상품인 만큼 유통 계열사가 함께 판매하자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가격도 5개 묶음 기준 2850원으로 당시 신라면보다 150원가량 낮게 책정됐다. 과거 라면사업 진출을 놓고 갈라진 형제가 각자 키운 롯데와 농심이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면서 당시 유통업계에서는 이를 '형제의 라면전쟁'으로 바라봤다.
두 형제는 영면하기 전까지도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2020년 1월 별세했을 당시 신춘호 명예회장은 빈소에 방문하지 않았다. 신춘호 명예회장은 1년 뒤인 2021년 세상을 떠났다.
수십년 지속된 갈등 관계는 창업주 시대가 지나고 나서야 풀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촌 관계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원 농심 회장은 사적인 모임을 함께하고 서로의 집안 장례를 챙기는 등 아버지 세대와 다른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과 농심 사이의 협업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선대 회장 시대의 앙금이 오너2세 시대에서 서서히 걷히고 있는 신호로 여겨진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