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8일 서울 중국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엔비디아,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이하 회장)가 지난 5~9일, 4박5일 방한 일정을 마치고 출국했다.
나라가 조용해졌다.
황 회장은 지난해 10월에 이어 이달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다. 7개월 만에 다시 방한했고, 일정도 대폭 늘렸다.
이번에도
정의선 현대기아자동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재벌 회장들이 버선발로 그를 맞았다. 정부도 환대했다.
황 회장의 쇼맨십 행보도 강화됐다. 재벌 회장들과 공개적으로 치맥(치킨+맥주), 쏘폭(소주+맥주), 삼겹살 회동을 하고, 프로야구 두산베어스 경기 시구도 했다. e-스포츠의 원조는 한국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서울 홍대 앞 거리 삼겹살집에서 '골든벨'을 울렸다. 골든벨이란 식당 안 손님들의 음식값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외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릴 만한 문화 키워드가 다 동원된 셈이다. 무엇보다 서민의 장소로 꼽히는 치맥 집과 삼겹살 집으로 4대 재벌 회장들을 불러내고, 재벌 회장으로 하여금 직접 집게를 잡고 삼겹살을 굽게 했다.
탁자 위에 맥주잔을 늘어놓고 적당량을 채운 뒤 소주잔을 겹쳐 올려놓고, 적당량을 채워 도미노처럼 떨어지게 하는 전통 방식 쏘맥 제조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전에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국내 재벌 회장이 삼겹살을 구우며 비계를 잘라내는 장면도 연출됐다.
황 회장이 등장할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모두 흥분했다. 왁자지껄했다.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
황 회장이 재벌 회장들을 만날 때마다, 아니 만남 일정이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해당 기업의 주가가 치솟았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업자 겸 공동대표,
장병규 크래프톤 창업자 겸 이사회 의장 등도 달려왔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저런 비즈니스 행보가 있을 수 있구나 감탄했다"며 "다음 방한 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말했다.
황 회장은 역시 노력한 기업가였다. 정치인 뺨치는 특유의 쇼맨십으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은 뒤, 국빈 수준의 환대까지 받아가며 사업상 필요한 것들을 전방위적이고 전략적으로 챙겼다.
황 회장은 이번 방한 기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회사는 물론 현대자동차, LG, 네이버, 두산 등 국내 AI 관련 기업들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났다. 각 그룹·기업 오너 내지 회장과 회동 일정과 별도로 사업장을 직접 찾아 동맹·제휴 관계를 맺었다.
엔비디아 주력 제품인 그래픽칩(GPU) 생산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을 다지는 동시에, 데이터센터 같은 AI 인프라 구축과 자율주행차·로봇 등 피지컬 AI 사업을 추진 중인 기업들과 손잡는 방식으로 새로운 판로도 열었다.
엔비디아는 CPU 기능까지 포함된 차세대 GPU를 로봇과 자율주행차 등에도 공급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수준의 제조업 기반까지 갖춘 AI 강국으로 꼽힌다.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공급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전력 등 AI 시대를 가속화할 수 있는 다른 여건들도 좋다.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와 더불어 로봇과 자율주행차 등 피지컬 AI 산업을 꽃피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통령까지 나서 '모두의 AI'와 '3대 AI 강국' 외치고, AI를 신성장 동력이자 새로운 먹거리로 꼽아 투자를 집중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반도체 특수로 발생한 전례없는 규모로 많이 걷힌 세금을 AI 인프라 구축과 관련 기술·부품 개발에 쏟아부을 계획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엔비디아 쪽에서 보면, 주력 제품인 GPU 생산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기업들이 있는 동시에 AI 관련 제품 공급을 확대하기에 매력적인 나라인 셈이다. 황 회장이 우리나라를 'AI 팩토리' 구현에 필요한 조건들을 다 완벽히 갖추고 있다고 치켜세우는 이유다.
AI 팩토리란 AI를 생산하는 공장이란 뜻이다. 거대언어모델(LLM)과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가리킨다. 기존 데이터센터가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처리하는 공간이었다면, AI 팩토리는 GPU·메모리·네트워크·전력을 통합해 AI 모델의 학습·추론부터 서비스 구동까지 AI 서비스 전 과정 생산을 담당하는 차세대 AI 핵심 인프라다.
우리나라를 뒤덮을 AI 팩토리가 엔비디아 GPU와 플랫폼 기술로 구축되게 하는 게 황 회장의 목표다.
실제 황 회장은 지난 방한 때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을 다지는데 집중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한국 AI 생태계가 엔비디아 칩과 기술 중심으로 구축될 수 있도록 동맹 수준의 전략적 제휴 관계를 넓히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챙겼다.
우선 엔비디아 최신 GPU 수십만 장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기가와트(GW)급 'AI 팩토리' 구축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만큼 큰 시장을 창출한 셈이다.
황 회장은 이번 방한에서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 베라 중앙처리장치(CPU), AI 노트북 'RTX 스파크', AI 엣지 슈퍼컴퓨터 '젯슨 토르'를 "한국을 위한 선물"이라며 내놨다. 모두 엔비디아의 차세대 핵심 제품들이다.
SK텔레콤과 네이버는 각각 엔비디아 인프라 기술을 기반으로 AI 팩토리를 구축하기로 했다. 기가와트급을 목표로 한다.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AI 시장 개척에 나설 계획이다.
SK텔레콤은 내년에 엔비디아 플랫폼 기술 기반 AI 팩토리를 첫 가동하고, 이후 이를 GW급으로 확장해 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설 방침이다.
네이버는 내년 상반기 55메가와트(MW)급 AI 팩토리를 선보이고, 이후 2028년에는 200MW, 이후에는 기가와트(GW)급까지 확장한다.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유럽·중동에 AI 서비스를 공급할 예정이다.
피지컬 AI 쪽에서는 한국의 제조 역량을 엔비디아 기술과 결합해 차세대 로봇·모빌리티 시장을 선점하는 그림을 그렸다.
LG는 차세대 로봇,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소프트웨어중심차(SDV) 등 미래 모빌리티 영역에서 각각 엔비디아와 손잡았다.
업스테이지, 트웰브랩스, 리얼월드, 로보티즈 등 대규모언어모델(LLM)부터 AI·로봇 기술·솔루션까지 독자적 경쟁력을 갖춘 국내 AI 스타트업들도 이번 황 회장 방한을 계기로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AI 생태계에 합류했다.
황 회장은 "한국은 AI의 미래에 투자하기에 정말 훌륭한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국내 AI 스타트업을 향해서는 "한국의 AI, 한국의 미래에 대해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이번 방한 중 서울 홍대 앞 삼겹살집에서 국내 재벌 회장들과 삼겹살 회동을 하며 '골든벨'을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기시감이 든다.
황 회장이 이번 방한 기간 중 SK·LG·현대차그룹·네이버 등과 맺은 AI 제휴들은 공통적으로 엔비디아 GPU와 플랫폼 사용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AI 인프라를 확장하고 피지컬 AI 사업을 강화할수록 엔비디아에 대한 기술 의존도 깊어지는 구조다.
황 회장 출국 뒤 업계에선 "우리나라 기업들의 엔비디아 의존이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에서 AI 인프라와 피지컬 AI 산업 전반으로 확대됐다"며 "엔비디아가 GPU 공급 주도권을 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우려되는 대목도 없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뼈아픈 경험이 있다.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 때부터 참여 정부(노무현 정부) 때까지 이어진 전자정부 구축과 국가정보화 추진 때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창업자와 스티브 발머 최고경영자가 우리나라를 뻔질나게 찾았다.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을 만나고, 재벌 회장들과 회동했다. 이번 황 회장 방한 행보와 다른 점은, 재벌 회장들과 회동을 비공개로 하거나 출국 뒤 만남 사실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스콧 맥닐리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 존 체임버스 시스코 회장의 방한도 잦았다. 야후와 라이코스의 최고경영자도 우리나라를 자주 찾았다.
모두 당시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의 창업자거나 최고경영자들이었다.
이들의 잦은 방한 목적은 분명했다. 전자정부와 국가정보화 프로젝트가 자사 제품과 기술 중심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MS가 집요했다.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것 같은 자세로 기술 지원을 약속했고, 창업자와 최고경영자 방한 때마다 오피스 프로그램 등을 대학과 초중고 등에 마구 뿌렸다.
한국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은 리서치센터, R&D센터, 기술지원센터 등의 지위와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리서치센터는 10~30년 앞, R&D센터는 1~5년 앞을 내다보고 시장을 예측하며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지원센터는 고객 기술 지원 요청을 해결하는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배치 인력의 급도 다르다. 리서치센터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각각 세계적 권위를 가진 학자 내지 노벨상 수상자가 영입되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연구개발센터로 통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후일 기술 지원을 담당하는 기술지원센터 수준으로 운영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황 회장이 한국에 만들겠다고 밝힌 엔비디아 연구개발센터가 어느 정도 지위인지 주목되는 배경이다.
우리 정부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 정부는 임기 내 전자정부 구축과 국가정보화 추진 실적을 내기 위해 청와대에 현황판까지 두고 각 부처와 정부·공공기관들의 정보화 추진을 독려했다.
당시는 전 정부 시절 국제금융기구(IMF) 구제금융으로 나라가 절딴 난 상태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IT 기술로 새로운 성장동력과 먹거리 산업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전자정부 구축과 국가정보화 추진 역시 예산을 쏟아부어 시장을 창출하는 목적이 컸다. '디지털 뉴딜 정책'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재벌 그룹들이 앞다퉈 시스템통합(SI) 계열사를 설립해 전자정부 구축과 국가정보화 추진 시장에 뛰어들었다. 삼성SDS·LGCNS·SKC&C 등도 이 때 설립됐다. 'LGEDS'(LGCNS 전신)처럼 글로벌 SI 업체와 합작법인 형태로 설립되기도 했다.
MS는 주요 재벌 계열 SI업체들과 손잡고, 우리나라 전자정부와 국가정보화가 자사 제품과 기술 중심으로 구축되도록 했다. 우리나라 쪽에서 보면, 전자정부와 국가정보화가 MS 기술과 제품에 종속된 형태로 구축되고 추진된 셈이다.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MS에 우리나라는 고객이었다. 하지만 '호갱'(호구 고객) 취급을 당할 때가 많았다.
시장을 독점한 기업에서 신제품의 최대 경쟁자는 경쟁업체 제품이 아닌 자사의 이전 제품일 때가 많다. 세계 개인용컴퓨터(PC)와 서버 운영체제(OS)는 물론 업무용 소프트웨어 시장까지 장악한 MS 역시 새로운 제품·기술 매출을 위해서는 이전에 공급한 제품·기술을 없애야 했다.
두가지 방법이 동원됐다.
먼저 인텔과 '윈텔 동맹'을 구축해, 서로에게 새 시장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매출을 키웠다. 인텔이 새 칩(CPU)을 장착한 피시로 MS 새 운영체제 수요를 일으키고, MS가 고사양 성능을 필요로 하는 새 운영체제를 내놔 인텔 새 칩과 그 칩을 장착한 고성능 PC 수요를 창출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또 이전 버전 운영체제에 대한 보안 지원을 중단해 새 운영체제로 갈아타게 하는 방법도 동원됐다.
MS가 특정 버전 윈도에 대한 보안 지원 중단 일정을 발표할 때마다 우리나라에선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국가사이버안전센터장 등 정부 고위인사가 미국 시애틀 MS 본사를 찾아가 보안 지원 중단 일정을 미뤄달라고 읍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윈텔 동맹으로 인텔과 MS의 PC 칩과 운영체제 시장 독점 상태가 이어지는 데 따른 부작용도 컸다. 소비자들은 기술과 제품을 선택할 수 없고, 이에 따라 호갱 처지는 갈수록 심화했다.
우리나라 AI 인프라와 피지컬 AI가 엔비디아 칩과 인프라 기술에 종속된 형태로 구축되면, MS에 당했던 설움을 엔비디아에 또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미 AI 인프라의 핵심인 GPU 시장은 엔비디아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이를 기반으로 AI 플랫폼 기술 시장 장악도 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GPU 수요 둔화 흐름이 일어나면, 엔비디아 역시 신제품·신기술 매출을 키우기 위해 기존 제품·기술을 죽일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 고객 쪽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새 제품·기술 구매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AI 인프라와 피지컬 AI 기업들도 엔비디아에 지나치게 의존했다가 큰 코 다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엔비디아가 AI 붐을 타고 혜성처럼 뜬 것처럼, 닷컴 붐 시절에는 썬마이크로시스템즈가 그랬다.
썬은 서버를 공급하던 업체였다. 클라이언트-서버 기술과 초고속인터넷 대중화, 홈페이지 구축 바람 등을 타고 성공 가도를 질주했다.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기업 성공의 대표적 사례로 꼽혔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없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네트워크 장비 공급업체로 이름을 날렸던 시스코 시스템즈의 모습도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
야후와 라이코스 등 세계적 포털 사업자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엔비디아가 썬마이크로와 시스코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젠슨 황이 스콧 맥닐리와 존 체임버스의 처지로 전락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렇게 되면 엔비디아 기술 생태계에 올인해 AI 관련 사업을 벌이고, 엔비디아 기술에 종속돼 AI 인프라를 구축해온 국내 기업들은 '닭 쫓던 개'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저주를 하는 게 아니다. 조심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재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