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면세점 인천공항점 ‘퍼퓸 아틀리에’ 전경. <신세계디에프> |
[비즈니스포스트]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임대료를 둘러싼 갈등이 ‘치킨게임’으로 흘러가고 있다. 법원에 조정 신청을 낸 호텔신라·신세계 면세점이 공항 면세점 전면 철수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는 가운데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조정기일 불참 방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텔신라·신세계면세점이 공항 면세점 사업을 일부 철수하려면 2천억 원 안팎의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공항공사 역시 재입찰시 큰 폭의 임대료 인하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4일 면세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인천공항공사가 조정 절차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지적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공사는 14일로 예정된 2차 조정 기일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공사 관계자는 “임대료 조정과 관련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2차 기일에 불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면세점을 운영하는 호텔신라와 신세계면세점 운영사 신세계디에프는 각각 올 4월, 5월 인천지방법원에 인천공항 제1·2터미널 면세점 중 화장품·향수·주류·담배 매장(DF1, DF2구역) 임대료를 40% 내려달라는 내용의 조정 신청서를 냈다.
지난달 30일 인천지방법원에서 1차 조정을 진행했으나 첨예한 입장 차만 확인한 채 종료됐고, 이달 14일을 2차 조정기일로 정했다. 현재 법원은 삼일회계법인 등에 적정 임대료 관련 감정촉탁을 의뢰한 상태다.
감정촉탁은 법원이 구체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전문성을 지닌 외부기관에 사실 확인 등을 의뢰하는 절차다. 전문기관을 통해 적정 임대료 수준을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은 감정촉탁서를 들고 공항공사를 법정에 앉혀 협상을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공사가 2차 조정기일에 참석하지 않으면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다. 두 면세점은 결렬되면 철수까지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라 관련 갈등이 ‘치킨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은 2023년 인천국제공항 면세점 사업권을 10년 계약으로 따냈다. 당시 인천공항 면세점 임대료는 기존 고정 임차료에서 공항 이용객 수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신라면세점은 DF1구역에, 신세계면세점은 DF2 구역에 각각 공항이용객 1인당 약 9천 원 수준의 단가를 제출했는데 이는 최저입찰가보다 60% 이상 많은 금액이라 당시에도 ‘승자의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공항 이용객 수는 빠르게 코로나19 확산 이전 이상을 회복했으나 이용객들의 지갑은 면세점에서 열리지 않았다. 2019년 약 25조 원에 이르렀던 국내 면세산업 규모는 이듬해 코로나19 확산으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약 15조5천억 원으로 40%가까이 쪼그라든 뒤 지난해에도 14조2249억 원에 머물렀다.
신라면세점과 신세계면세점이 DF1, DF2 구역에서 공사에 납부하는 임대료는 연간 약 3200억 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런 가운데 면세점보다 로드숍을 방문하는 소비 추세 확산과 고환율로 인한 가격경쟁력 저하 등이 맞물리면서 두 면세점은 매달 수십억 원의 영업손실을 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천억 원 수준의 천문학적 위약금을 감수하고서라도 전면 철수 카드까지 고려하고 있는 이유다.
면세업계 관계자는 “2023년 당시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면세점 매출이 2019년 수준으로 회복 될 것이라고 보고 입찰에 들어간 것”이라며 “고환율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비 패턴 변화로 면세점 매출이 쪼그라들면서 면세 업계 전체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공항공사 역시 면세점 철수가 현실화한다면 실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의 영업이익에서 비항공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60% 수준이다. 비항공이익 가운데 면세점 임대료는 약 60%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 신라면세점 인천공항 제2터미널 화장품·주류 매장 전경. <호텔신라> |
물론 공항공사도 임대료 인하 불가 방침에 합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국제 입찰로 체결된 계약 조건을 임의로 변경하는 것은 배임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또 두 면세점의 임대료를 인하해주면 이들이 제시한 높은 입찰가 제안에 밀려 사업권을 얻지 못한 업체들 사이의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면세업계에서 수년 동안 업황 부진으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부는 가운데 공항공사가 조정 절차에 참석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세계면세점은 작년 11월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올 1월엔 시내면세점인 부산점을 폐점했다. 신라면세점도 4월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더욱이 두 면세점이 인천공항 DF1과 DF2 구역에서 철수하고 재입찰이 진행되면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중국 국영면세점그룹(CDFG) 등의 진출로 국내 면세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CDFG는 2023년 인천공항 면세점 1~4구역에 입찰 제안서를 냈으나 신라와 신세계에 입찰가에서 밀려 사업권을 따내지 못했다.
업계 관계자는 “인천공항 면세사업권은 돈싸움인데 2개 구역이 재입찰에 들어가면 롯데면세점과 CDFG의 사업권 확보가 유력하다”며 “특히 시내 면세점을 입찰 심사에서는 국내 면세점 관리 경험 유무가 중요한데 CDFG가 공항에서 운영 경험을 쌓으면 이를 바탕으로 시내 면세점 사업권도 따낼 것”이라고 말했다.
두 면세점은 법원의 감정촉탁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입찰 시 후속 사업자의 임대료가 크게 낮아질 가능성이 큰 만큼 감정촉탁을 진행한 상황에서 공항공사가 조정기일에 참석조차 하지 않으면 해당 행위가 오히려 실질적 배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면세업계 변화를 고려해 해외 주요 공항들이 임대료를 조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최근 대기업 면세 사업자 임대료를 15% 내렸고, 중국 상하이 푸동공항은 2023년 말 임대료를 여객 수가 아닌 실매출 연동 방식으로 변경했다.
인천공항공사 관계자는 신라·신세계면세점 철수 우려와 관련해 “공사쪽으로 별도로 철수 의사가 접수된 건이 없어 따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