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디스 코퍼레이션(Moody’s Corporation)의 CEO 롭 파우버(54). 버지니아대와 코넬대 존슨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가 무디스에 합류한 건 2005년.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신용평가를 담당하는 무디스 인베스터 서비스의 사장을 지냈고, 2021년 모회사 무디스 코퍼레이션의 CEO에 올랐다. 참고로 국내 최초 신용평가사인 ‘한국신용평가’(주)가 무디스 계열사다. 2001년 무디스에 편입되었고, 2016년엔 지분율 100% 자회사가 되었다. <무디스> |
[비즈니스포스트] “우리는 미국과 무디스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이 1995년 2월22일 칼럼(Foreign Affairs; Don't Mess With Moody's)에서 했던 전설적인 선언이다.
프리드먼은 칼럼에서 “미국은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무디스는 채권 등급을 하락시킴으로써 한 나라를 파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무디스가 멕시코와 캐나다의 신용등급을 낮춘 상태였다. 프리드먼은 “무디스의 영향력을 의심한다면 멕시코와 캐나다에 물어보라”(If you doubt Moody's influence, ask Mexico and Canada)는 말로 신용평가기관의 절대적인 권력을 꼬집듯 전했다.
무디스(Moody’s)는 스탠다드 앤 푸어스(S&P Global), 피치(Fitch Ratings)와 함께 빅3 글로벌 신용평가기관으로 불린다.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토마스 프리드먼은 무디스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걸 아닐까? 결코 그렇지 않다.
2011년 8월 영국 가디언은 15년 전 프리드먼이 했던 말을 다시 소환하면서 “무디스는 경쟁사인 S&P, 피치와 함께 미국 정부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오바마 정부는 부채 문제로 코너에 몰려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토마스 프리드먼의 ‘1995년 선언’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한 셈이다.
분명한 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신용평가기관들의 존재감은 더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블랙 스완(Black Swan)’ 같은 코로나 사태는 각국 정부의 부채를 눈덩이처럼 키웠다. 백신 도입에 퍼부었던 비용이 컸던 이유다. 정부의 재정이 취약해질수록 신용평가기관들은 정부 채권의 신용도를 낮춤으로써, 프리드먼의 말처럼 국가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필자가 이런 취지의 글을 쓰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한국의 정국 불확실성 때문이다. 한술 더 떠, 2기 행정부를 출범시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농담조로 “내가 혼란스럽다고? 한국을 보라”며 한국을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무디스를 비롯한 글로벌 신용평가기관들도 조심스럽게 한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국 불안정을 이유로 한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상황. 자칫 그런 현실이 벌어질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만만찮다.
▲ Uncertainty. 무디스, S&P, 피치 같은 글로벌 신용평가기관들이 정국 불안정이라는 ‘불확실성’을 이유로 한국의 신용등급을 낮출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
정부 신용등급을 통상 소버린 레이팅(Sovereign Rating)이라고 한다. 정부 신용등급은 국제사회에서 해당 국가의 신인도로 작용하면서 해외 자금 조달이나 차입금리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909년, 무디스 창업자 존 무디(John Moody: 1868~1958)가 미국 철도기업이 발행한 채권에 처음으로 신용등급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신용평가기관들은 무소불위의 파워 집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 신용평가시장은 무디스, S&P, 피치 등 3사가 95%를 과점하고 있다. S&P와 무디스가 합쳐 시장점유율 80%, 피치가 15% 정도다. 피치가 3위라고는 하지만 그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S&P와 무디스의 등급이 서로 다를 때 피치가 ‘타이 브레이커(tiebreaker: 최종 결정권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크면 드리우는 그림자도 큰 법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따가운 비난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 사례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당시 부실평가, 이해 상충 등이 드러나면서 책임론이 거세게 대두됐다. 신용평가에 정통한 한 국내 전문가는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모기지 사태 이후 신용평가사들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신용평가사들이 수천 건에 달하는 모기지유동화증권에 대한 신용평가와 관련해 방법상 오류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신용평가업계 자체의 규율 준수도 제대로 이루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김병기 저, ‘새로운 경제 권력 신용등급’, 매경)
세계적 경제사학자인 컬럼비아대 애덤 투즈(Adam Tooze) 교수의 쓴소리도 들어보자.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벌어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분석한 저서 ‘붕괴(Crashed)’에서 신용평가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 신용평가기관의 한 전문가는 2006년 12월 동료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모두 부자가 되어 이 모래성이 무너질 때쯤에는 은퇴할 수 있기를 바라자고^^”> (애덤 투즈 저, ‘붕괴’, 아카넷 출간)
애덤 투즈 교수는 ‘^^’라는 표시까지 빼놓지 않았다. ‘절대적 권력자’인 신용평가기관들이 ‘시장 감시자’라는 본연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 무디스의 ‘매력적인 자산’ 중 하나로 워런 버핏을 꼽는 전문가들도 있다. 무디스는 워런 버핏의 포트폴리오 바구니 안에 있다. 버핏이 가장 오래 보유한 10개 주식 리스트에 무디스(버핏이 22년 보유)가 포함되어 있다. 버핏이 이끄는 투자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는 무디스의 주요 주주로, 무디스 주식 약 13%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핏이 무디스 주식을 장기 보유하는 이유는 단 하나, 높은 수익률 때문이다. 그는 3년 전 폭스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무디스 투자에 대해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It's a very good business)”라고 말했다.
게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버핏의 오른팔 찰리 멍거는 무디스 주식을 하버드대에 비교(Moody’s is a little like Harvard)하기도 했다. 우량주 중의 우량주라는 것이다. 버핏이 무디스 주식을 장기 보유하고 있다는 건 무디스의 외부 신뢰도에도 크게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그런 무디스를 이끌고 있는 수장의 글을 읽다가 매력적인 문장을 접했다. 무디스 코퍼레이션(Moody’s Corporation)의 CEO 롭 파우버(Rob Fauber·54),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특히 불확실한 시대에는 말이죠. (What we do matters to the world, especially in times of uncertainty)”
글로벌 비즈니스 매체 브룬스윅 리뷰(Brunswick Review, 2023년 11월)와의 인터뷰에서다. 무디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존재와 목적을 재정의하고, 그에 따른 사업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는 생각으로 읽힌다.
좁게는 무디스 조직원들에 대한 주문인 동시에, 넓게는 다른 비즈니스맨들에게 던지는 충고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불확실성 시대엔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롭 파우버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는 인터뷰에서 ‘블랙 스완(Black Swan)’을 언급하면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정상적인 사건들이 더 규칙적으로 일어나면서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정상적인 사건들이란 코로나 사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다. 한국 경우엔 비상계엄 상황이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경영학자이자 위기분석 전문가인 나심 탈레브(Nassim Taleb)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를 ‘블랙 스완’에 빗대었고, 그것이 가져올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경고한 바 있다. 국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우리는 여러 마리의, 결코 우아하지 않는 ‘블랙 스완들’과 마주하고 있다.
▲ 글로벌 신용평가 시장은 S&P, 무디스, 피치가 95%를 과점하고 있다. △S&P는 헨리 푸어와 그 아들인 헨리 바넘 푸어(Henry Varnum Poor) 부자의 손에서 시작됐다. 훗날 스탠다드 스테틱스(Standard Statistics)와 합병하면서 오늘날의 S&P가 되었다. △무디스(Moody’s)는 채권 평가 선구자로 전해지는 존 무디(John Moody)가 설립한 회사다. △피치는 존 놀스 피치(John Knowles Fitch)가 미국 뉴욕에서 피치 퍼블리싱 컴퍼니(Fitch Publishing Company)라는 회사를 세우면서 오늘날의 피치(Fitch Ratings)로 성장했다. |
그럼, 우리는 불확실성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만 따져보자. 기업의 입장에서 불확실성은 분명 기업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 즉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한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투자가 쪼그라들고 조직도 움츠러든다.
일류, 이류, 삼류는 여기서 차이가 난다. 3류는 불확실성 탓에 과거로 회귀하고, 이류는 현재에 멈춰 서지만, 일류는 미래로 한 걸음 나아간다. 즉 불확실성을 걷어내기만 하면 성장의 디딤돌, 다시 말해 플러스(+) 요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상황이 어려울 땐 전략·전술가들로부터 해답에 가까운 해결 방안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필자는 기업인들에게 미국 경제학자이자 시카고학파 창시자 중 한 명인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의 말을 추천한다. 그는 일찍이 ‘위험, 불확실성과 이윤(Risk, Uncertainty and Profit)’이라는 제목의 명저에 이렇게 썼다.
“기업의 이윤은 불확실성과의 ‘성공적인 교전’에서 창출된다.”
나이트는 기업가를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사람(entrepreneur for bearing inevitable uncertainty)’이라고 했다. 불확실성에 맞서 교전을 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프랭크 나이트가 큰 틀에서 전략을 전해줬다면, 워런 버핏에게서 구체적인 전술을 배워보도록 하자.
버핏은 평소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를 강조했다. 중세의 성은 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깊은 연못인 ‘해자’를 파놓는데, 버핏은 이 ‘해자’를 기업 경쟁 우위의 개념으로 즐겨 사용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불확실성이라는 전시 상황에선 기업을 보호하고, 때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해자’를 평상시보다 훨씬 넓게, 훨씬 깊게 파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무디스의 등급방식을 빌려 프랭크 나이트와 롭 파우버 어록에 신용등급을 매겨본다.
프랭크 나이트: “기업의 이윤은 불확실성과의 ‘성공적인 교전’에서 창출된다.”(Aaa)
롭 파우버: “불확실성 시대엔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Aa1).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