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제곱미터' 영화로 마주한 불편한 진실, 부동산 공화국의 '층간소음 그늘'

▲ 서울의 아파트 단지 모습. 영화 '84제곱미터'에서는 서울 아파트를 갖기 위해 수억 원의 빚을 진 '영끌족' 청년이 층간소음을 시작으로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영화 '84제곱미터' 공식 티저 예고편 갈무리>

[비즈니스포스트] “괜히 층간소음 막으려고 튼튼하게 짓겠다고 공사비 오르면 분양가도 오를 것 아니야? 그러면 너 같은 것들은 더 집을 못 사.”

영화 ‘84제곱미터’에서 나온 입주자 대표가 ‘영끌족’ 청년에게 던진 대사다. 국민 순자산의 75%가 부동산에 쏠려 있는 우리나라의 아파트 건설 과정이 지닌 모순을 찌르는 말이다.

이 영화에는 층간소음으로 시작된 이웃 사이 다툼, 층간소음의 원인이 된 부실 시공과 비리, ‘영끌족’의 비극적 모습, 집값에 일희일비하는 현상 등 ‘부동산 왕국’이 된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7일 넷플릭스에 따르면 영화 ‘84제곱미터’는 지난 18일 공개 이후 ‘오늘의 대한민국 톱10 영화’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84제곱미터’는 ‘국민평형’으로 일컬어지는 전용면적 84㎡ 아파트로 내 집 마련에 성공한 영끌족 청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층간소음에 시달리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 스릴러 장르의 영화다.

올해 들어 ‘84제곱미터’ 이전에도 ‘백수아파트’, ‘노이즈’ 등 각기 장르는 다르지만 층간소음을 주요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연이어 공개됐다. 층간소음이 일상과 얼마나 가까운 문제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인 셈이다.

영화의 이야기 흐름은 층간소음이 그간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 왔는지 변화하는 양상을 그린다.

영화 속 주인공은 처음에는 원인 모를 층간소음을 견디다 점차 이웃 주민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예전 같았으면 서로 다 아는 사이니까 배려하고 참고 사는 거지”, “아파트 자체 문제인가요, 사람이 문제지”와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과거 층간소음이 개인의 일탈, 또는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일로 치부됐다는 점을 투영한다.

극 중반부터 다수 입주민이 층간소음 갈등에 휘말리면서 끝내 주민 사이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고 공권력이 개입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층간소음이 개인의 일탈, 일상적 불편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비화된 것이다.

영화라는 창작물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얼핏 극단적 사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일은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겪다가 이웃 주민을 죽인 사건들은 심심치 않게 뉴스를 통해 전해져 왔다. 최근 한 주민이 ‘칼부림’을 언급하는 협박 문구를 아파트 라인 모든 세대 출입구에 붙여 벌금을 선고받은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영화는 층간소음 탓에 벌어지는 안타까운 비극의 근원에 아파트 구조와 부실시공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주인공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벽식 구조’로 지어졌다. 벽식 구조는 기둥이나 들보 등이 없이 수직부재인 벽체와 수평부재인 슬래브만으로 구성돼 대부분의 하중을 벽으로 지탱하는 건축구조다.

벽식 구조는 벽이 하중을 고스란히 받는 방식인 탓에 바닥이나 천장을 통한 소음 차단에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시공 속도가 빠르고 공사비가 저렴하다는 장점 때문에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대단지 공급이 늘어나면서 국내 아파트 구조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층간소음에 노출되기 쉬운 벽식 구조를 놓고는 꾸준히 문제가 제기돼 왔다.

2021년 조오섭 당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동주택에 벽식 구조를 주로 채택해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조 의원인 토지주택공사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2025년 공급예정인 토지주택공사 아파트 14만여 가구 가운데 85%가량인 12만여 가구가 벽식 구조를 채택했다.

조 의원은 "최근 5년 동안 토지주택공사의 공동주택에서 층간소음 민원이 1천 건에 육박하고 있다"며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장기적 관점에서 건축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84제곱미터' 영화로 마주한 불편한 진실, 부동산 공화국의 '층간소음 그늘'

▲ 층간소음을 낸다고 오해 받는 주인공 집 앞에 아파트 주민들이 몰려와 항의하고 있는 모습. <영화 '84제곱미터' 공식 티저 예고편 갈무리>

벽식 구조와 함께 건설업계의 뿌리 깊은 ‘부실시공’ 우려, ‘카르텔’로 일컬어지는 비리·부패 문제 역시 층간소음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영화에서는 비리 검사가 감리사 남편과 손잡고 부실시공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관련자들에게 뒷돈을 챙기고 이를 고발하려는 언론 보도를 묵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한 입주민은 “왜 똑바로 안 짓고, 누가 빼돌리고, 누가 봐주는걸까”고 한탄한다.

관할 공무원이나 공공기관과 시공사, 시행사, 감리사 그리고 그 아래 하청업체까지 수평적, 수직적으로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얽힌 건설현장에서 나타나는 비리는 관행처럼 굳어진 부조리로 남아 있다.

2023년 4월 발생한 GS건설의 인천 검단신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사고에서는 시공 과정에 전단보강근이 누락됐지만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검수·감독 업무를 소홀히 한 일, 설계 당시 오류를 범했음에도 전관인 설계업체에 벌점을 부과하지 않은 일, 토지주택공사의 현장 감독자가 전관 업체에서 상품권을 수수한 일 등 다양한 형태의 비리가 감사원 감사 결과 나타났다.

지난 2월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정기업의 부산 복합리조트 신축공사장 화재사고에서는 경찰수사에서 시행사, 시공사가 이른 사용 승인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감리사를 압박해 허위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고 이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관할 공무원들이 고급 호텔 식사권 등을 받은 일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84제곱미터’는 건설·부동산 안팎에서 발생했던 크고 작은 사건, 현상들까지 다룬다. 층간 소음을 유발하는 '부동산 공화국' 문제가 각종 사회 문제와도 어떻게 연결돼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파트 외벽이 무너지는 짧은 영상이나 ‘순살 아파트’가 적힌 신문 스크랩 장면은 2022년 1월 광주 화정에서 발생한 HDC현대산업개발의 아파트 붕괴사고와 2023년 4월 인천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입주민 대표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노선 선정을 앞두고 집값 하락을 우려해 층간소음 갈등을 키우지 말자고 회유하는 장면, 인근에 GTX 정차역이 예비타당성 조사대상에 최종 선정되자 무엇보다 기뻐하는 입주민들의 모습 등은 현재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동산 가격에 목을 매고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외에도 아파트 매수를 위해 수억 원의 빚을 진 주인공이 대출금을 감당하기 위해 ‘리딩방’의 정보로 가상화폐(코인)에 투자하는 장면 등은 빚으로 떠안은 부동산이 어떻게 투기와 불안을 낳는지까지를 설명해 준다.

영화 ‘84제곱미터’의 김태준 감독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층간소음이라는 주제를 잡고 자료를 찾다보니 부실시공, 영끌이라는 소재가 올라왔다”며 “층간소음과 우리나라 부동산 현실이 연결된 확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장상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