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19년 12월1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선거법 개정안 본회의 상정 및 후퇴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민주평화당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 1억 원에 공급' 내걸어
민주평화당은 2020년 1월20일 제21대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를 1억 원에 공급'방안을 내놨다.
민주평화당의 총선 1호 공약은 공공부문이 토지를 보유한 채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주택 공급을 추진해 집값을 안정시키면서 무주택 서민, 청년, 신호부부 등의 주거불안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목표를 갖고 있다.
소비자 분양대금으로 건축비를 마련한 뒤 다른 사업비는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공적 기금을 활용해 재원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동영은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약을 공개하며 "기존의 분양 위주 또는 민간건설사 위주의 공공주택 개발 방식을 탈피해 저렴한 공공주택 공급, 공공의 자산 증가를 기초로 하는 주택 공급방식의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4+1협의체 통해 선거법 개정안 통과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대표로서 2019년 12월에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정의당, 대안신당 등과 ‘4+1협의체’를 통해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데 적극적 역할을 했다.
정동영은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민주평화당의 역사적 소명은 선거제 개혁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는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순탄치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안, 검찰개혁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의 처리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였다.
패스트트랙 법안의 본회의 처리가 지연되면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선거법 개정안보다 검찰개혁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정동영은 이 원내대표의 제안에 “지난 4월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할 때 분명한 합의문이 있다”며 “선거법 개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것으로 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반발했다.
4+1협의체가 선거법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합의를 보는 과정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석패율제 도입과 구체적 연동률, 연동률 캡 등을 놓고 협의체 내 정당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결국 연동률 50%, 연동률 캡 30석으로 4+1합의체 내 정당들이 합의를 봤고 선거법 개정안은 2019년 12월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평화당 비당권파 의원 10명 집단 탈당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 소속 민주평화당 의원 10명이 2019년 8월12일 집단으로 탈당했다.
당시 탈당한 의원은 원내대표였던 유성엽 의원을 비롯해 천정배, 박지원, 장병완, 김종회, 윤영일, 이용주, 장정숙, 정인화, 최경환 의원 등이다.
정동영은 의원들의 집단탈당을 놓고 “10명의 의원이 탈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참으로 유감”이라면서도 “민주평화당은 구태정치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2020년 총선에서 바른미래당의 노선과 공천권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졌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당 운영방식을 놓고도 정동영을 비판했다. 정동영이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주현 최고위원을 임명하는 등 당을 일방적으로 운영한다며 2019년 6월17일부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은 2018년 8월5일 민주평화당 전당대회에서 최경환, 유성엽, 민영삼, 이윤석, 허영 등과 경쟁해 68.57%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로써 정동영은 10여 년 만에 중앙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2020년 21대 총선까지 민주평화당을 이끈다.
정동영은 당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주평화당’이라는 구호처럼 대표 선출 다음 날인 8월6일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 최고위원회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은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해직자 분향소가 마련돼 있는 곳이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을 방문한 뒤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고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시민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정동영은 2018년 9월 3차 남북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로 참가해 북한을 방문했다.
정동영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서울에 오시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환담을 건넸다. 김 위원장은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하진 못했다”고 대답했다.
△국민의당 탈당과 민주평화당 입당
정동영은 2018년 2월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한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정동영은 2016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국민의당을 선택했으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바른정당과 합당하려 하자 국민의당을 탈당했다.
안 대표가 대표 자리를 걸고 합당을 결정하는 당원 투표를 제안하자 정동영은 “안철수의 불통정치”라며 “박정희식 골목독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정동영은 박지원 의원 등 합당 반대 세력과 함께 평화개혁연대를 출범했다. 평화개혁연대는 2018년 2월6일 민주평화당으로 창당했다.
정동영은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평화당 전북도지사 후보로 차출될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직접 출마하는 대신 민주평화당 후보들의 유세를 지원했다.
민주평화당은 기초자치단체장 5석과 광역자치단체 의원 3석, 기초자치단체 의원 4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국민의당으로 정계복귀
정동영은 2016년 2월18일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정동영은 서울 관악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하면서 고향인 순창군에서 자숙기를 보냈다.
정동영은 2016년 4월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전주병 지역구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47.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4선에 성공했다.
정동영은 국민의당 소속이 된 뒤 2017년 7월 정부의 사드배치를 비판했다. 정동영은 4년8개월 만에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안보 목적으로 사드배치를 했지만 오히려 안보와 국익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동영은 2017년 8월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장을 냈으나 안철수 후보에 700표가량 차이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다만 호남권, 특히 전북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확인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확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취임 후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자 정동영은 언론 등을 통해 안철수 대표를 비판했다. 10월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사실상 무산되자 정동영은 안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출마
정동영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정동영은 2007년 7월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중산층과 통하는 대통령', '중소기업과 통하는 대통령', '중용의 정치로 통합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이라는 3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적극적인 중산층 창출 정책으로 5년 내에 중산층이 70%인 나라를 만들 것”이라며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 시대와 비교되는 '중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0월15일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이해찬 손학규 후보들을 꺾고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후보 수락연설에서 “돈있고 땅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약육강식 경제, 이명박식 경제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이명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열린우리당이 흡수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시 민주당 탈당파와 한나라당 탈당파가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정동영은 대선 투표결과 이명박 후보와 530만 표 차이를 나타내며 2위에 머물렀다. 이는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전까지 대선에서 1위와 2위의 최다 격차로 남았다. 여당의 지지율 약세와 호남 출신 후보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통일부 장관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분당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으로 당을 옮겨 여당이 됐다.
정동영은 열린우리당에서 초대 의장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지지율이 상승세를 이어가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했다. 과반 의석은 확보했으나 개헌선까지는 미치지 못해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정동영은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에 취임했다.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도 같이 맡아 했기 때문에 부총리급 위상이었다.
정동영은 1994년 기자로서 통일부를 출입했는 데 10년 뒤 장관이 됐다. 취임 직후 468명에 이르는 대규모 탈북자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입국하면서 북한이 '최대 적대행위'로 규정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으나 2004년 12월 개성공단을 첫 방문하는 등 개성공단 활성화에 기여했다.
정동영은 2005년 12월 지방선거를 위해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2월 다시 한번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았고 결국 열린우리당은 광역자치단체장을 고작 1석만 차지하는 등 대패했다.
정동영은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2006년 6월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났다.
△정치 입문
정동영은 1996년 당시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정동영은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주시 덕진구로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9만7857표)를 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 뒤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200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다.
정동영은 이런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에 밀려 대선 후보가 되지 못했다.
△문화방송(MBC) 시절
정동영은 문화방송에 입사해 기자에서 앵커가 됐다.
정동영은 기자 시절 5·18 민주화운동 현장의 특파원으로 취재했지만 취재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 정동영은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다 마감뉴스 0시 앵커를 맡기도 했다.
정동영은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를 받았다.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귀국한 뒤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순발력 있게 현장 중계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