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안전을 위한 졸음쉼터 추가 설치
이강래는 고속도로와 국도 교통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국토교통부와 함께 고속도로 졸음쉼터를 추가로 설치하고 시설을 휴게소 수준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졸음쉼터는 2011년부터 고속도로에 처음 설치하기 시작해 2018년 4월 현재 290개소(도공 218, 민자 23, 국도 49)까지 늘어났으며 2021년까지 추가로 84개소(도공 26, 민자 18, 국도 40)가 설치된다.
고속도로의 휴게시설 사이의 간격이 25킬로미터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터널, 교량에 인접해 설치를 미뤄 오던 26개소에 2018년 설치방안 수립용역을 시행하고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설치하기로 했다.
그동안 미활용 버스정류장 등 자투리 땅을 활용해 비상주차 개념으로 주로 설치했으나 이용 차량이 늘어나면서 진출입로가 짧고 화장실과 편의시설이 부족해 운전자의 개선요구가 많았는데 이번에 고치게 된 것이다.
| ▲ 2019년 1월7일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에서 열린 산하단체장 신년인사회에서 김현미 장관(왼쪽)과 이강래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악수하고 있다. |
△도로공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변화와 혁신 강조
이강래는 2019년 1월4일 있었던 시무식에서 다가오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변화와 혁신의 길로 전진하자고 강조했다.
도로공사 사장 취임 2년차를 맞이한 이강래는 “2018년 수립한 사람 중심의 스마트고속도로 비전을 기반으로 2019년은 새 시대로의 전환과 대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며 “국민과 함께하는 따뜻한 기업으로 거듭나자”고 말했다.
특히 △안전한 고속도로 만들기 △사회적 가치 실현과 공공성 강화 △휴게소 음식 품질 및 가격 혁신 △남북교류 시대 준비 △미래경쟁력 확보 △청렴한 기업문화를 당부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9년 공사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홈페이지를 열기도 했다.
기념 홈페이지는 어제-오늘-내일의 시간 흐름에 공사 및 고속도로의 역사, 성과, 미래상 등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자회사 설립
이강래는 2018년 8월7일 한국도로공사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 시설관리를 설립하고 현판 제막식을 열었다.
한국도로공사 시설관리는 모회사인 한국도로공사 시설의 미화, 경비, 시설물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한국도로공사는 시설관리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2018년 2월에 신설된 전담부서를 주축으로 임금체계 등 자회사 설립 관련 제반사항 논의를 위한 실무협의회를 구성하고 4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노사 사이의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전국 각지의 용역업체 소속이었던 근로자들이 체계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회사로 통합됨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세종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박차
이강래는 서울시와 세종시를 연결하는 서울~세종 고속도로 건설공사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8년 2월12일 남한산성 터널 시점부인 성남시 중원구에서 첫 발파 기념식을 열었다. 남한산성터널은 총 연장 8.3킬로미터로 서울~양양 고속도로 인제터널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 된다.
특히 이 터널 굴착공사는 남한산성 도립공원을 통과하는 노선 특성을 반영해 공사할 때 발생하는 진동을 최소화하고 지하수 오염을 방지하는 등 친환경공법이 적용된다.
서울~세종 고속도로는 2017년 7월 민자사업에서 도로공사가 시행하는 재정사업으로 사업방식이 바뀌었다. 도로공사는 민자사업으로 추진할 때에 비해 1년6개월 단축된 2024년 6월 전 구간 개통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세종 고속도로는 총사업비 8조1천억 원을 들여 왕복 6차로, 연장 130킬로미터 규모로 지어진다.
이강래는 "남한산성터널은 친환경 공법을 적용해 자연환경 훼손을 최소화할 계획이다”며 “앞으로도 지역주민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현장 관계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안전한 고속도로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취약계층 지원활동에 열중
이강래는 한국도로공사를 통해 취약계층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강래는 도로공사 직원이 1권의 도서를 기부할 때마다 도로공사가 어린이 도서 1권 및 장학금 5천 원을 적립하는 방식의 도서매칭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018년 2월1일 아동복지시설 어린이와 저소득 가정 중고등학생들의 교육지원을 위해 도서 1만 권(3400만 원 상당)과 장학금 2600만 원을 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이강래는 "한국도로공사가 제공한 장학금과 도서가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이끌 우리 학생들이 꿈을 키워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해 공공기관으로서 공공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가치 실현을 선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지원
이강래는 2018년 1월5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희범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과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도로공사는 협약에 따라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에 약 50억 원을 지원했다. 39억 원은 현금으로 지원하고 11억 원은 패럴림픽이 끝나는 3월 말까지 대회 행사차량의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도로공사는 올림픽 기간 정부의 공약사항으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대회 행사차량뿐 아니라 일반차량도 통행료를 면제했다.
도로공사는 1억2천만 원 상당의 올림픽 입장권을 구매해 개최 지역 내 소외계층에 배부하고 직원 50명을 평창 동계올림픽에 파견해 인원관리, 수송대책 수립 등의 업무를 지원했다.
이강래는 2018년 2월1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을 방문해 평창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단에게 격려금 2천만 원을 전달하기도 했다.
△대규모 인사
이강래는 취임 이후 대규모 인사를 시행했다.
2018년 1월5일 신재상 부사장 겸 건설본부장, 최광호 기획본부장, 박승갑 경영본부장, 박상욱 사업본부장 등 상임이사 5명 가운데 4명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강래는 이어 본사 실·처장 30명 가운데 26명을 교체하는 인사도 했다.
업계에서는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빠른 인사에 이강래가 새로운 도로공사를 위해 김학송 전 사장의 흔적 지우기에 나선 것으로 바라봤다. 이강래는 전북에서 3선, 김 전 사장은 경남에서 3선을 지냈다.
△도로공사 사장 취임
2017년 11월29일 제17대 한국도로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강래는 취임사에서 “한국도로공사의 공적 기능 회복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매진할 것”이라며 공기업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도로공사 사장은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토교통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김학송 전 사장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뒤 4개월 만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공기업 사장을 임명한 것은 이강래가 처음이었다.
이강래가 도로공사 사장에 임명된 데는 지난 대선에서의 역할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인연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강래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동교동계의 지지를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김현미 장관과 같은 전북 출신으로 김 장관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등을 지내 이강래와 비슷한 정치행로를 걸었다. 이강래와 김 장관은 1990년대 초반 평민당에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야인 생활
2012년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전북 남원순창에 출마했으나 강동원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2위로 밀려 4선에 실패했다.
이강래는 2012년 3월19일 공천이 확정됐으나 다음날 경선 과정에서 금품이 오갔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민주당은 이에 따라 이강래의 공천을 보류했다.
하지만 총선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등을 고려해 공천을 다시 확정했는데 이강래의 낙선에는 이런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강래는 19대 총선에서 2만4268표(42.77%)를 받아 2만8007표(49.36%)를 받은 강동원 후보에게 밀렸다.
2012년 6월 선거가 끝난 뒤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객원교수로 일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2015년 12월 현실정치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20대 총선에서 서울 서대문을에 출마를 선언했다.
지금껏 지역구였던 남원순창 대신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에서 지속적으로 의원을 배출한 서울 서대문을을 선택하면서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강래는 당시 ‘서대문을 출마의 변’을 통해 “세 번씩이나 당선시켜 준 남원. 순창의 고향 주민들께 송구스럽지만 정치적 포부를 펼치기 위해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소신에 따라 서대문을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강래는 2016년 3월 서대문을 지역구 후보를 놓고 벌어진 더불어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김영호 후보에게 져 20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이강래는 당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경선결과에 승복하고 당을 돕겠다”며 “더불어민주당 서대문을 지역의 김영호 후보를 도와 당의 승리와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서대문을에서 4선에 도전한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을 꺾고 초선 의원이 됐다.
2017년 4월 서울 더불어민주당 당사에서 10여명의 동교동계 원로인사들과 함께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18대 국회
2008년 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전북 남원순창에 출마해 52.93%(3만77표)를 받아 3선에 성공했다.
18대 국회에서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냈고 지식경제위원회, 기획재정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2008년 5월 총선 뒤 곧바로 치러진 당내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했으나 2차 결선투표 끝에 원혜영 의원에게 밀렸다.
2009년 5월 치러진 당내 원내대표 선거에서 이종걸 의원과 단일화를 하며 박지원 의원, 김부겸 의원을 꺾고 18대 국회 민주당 2기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이강래는 원내대표 당선 뒤 기자간담회에서 “당의 통합과 단결, 당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원내대표 당선 뒤 갑작스럽게 이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6월 임시국회 개회 등을 놓고 여당인 한나라당과 극한 대립각을 세웠다.
한나라당과 대립각은 종합편성방송 등을 허가하는 내용을 담은 ‘미디어법’ 저지로 이어졌고 이강래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를 막지 못한다면 18대 국회는 사실상 조종을 울릴 것이다. 이번에 막지 못하면 민주개혁세력의 내일은 없다. 합심해서 싸우자”고 의원들을 독려하며 강경투쟁에 나섰다.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함께 미디어법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만났으나 강경한 입장차만 확인할 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정세균 당시 민주당 대표도 단식농성으로 법안처리를 반대했으나 한나라당은 2009년 7월22일 법안통과를 밀어붙여 몸싸움 끝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디어법 처리 문제는 결국 헌법재판소까지 올라갔고 헌재는 2009년 10월29일 미디어법의 국회 통과와 관련해 절차에 문제가 있으나 결과는 유효하다는 결론을 냈다.
이강래는 7월23일 의원총회에서 의원 전원과 함께 총사퇴를 결의하고 장외투쟁을 시작했다.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마저 서거하자 이강래는 한나라당과 다시 만나 국회 일정을 협의해 9월 정기국회를 열고 국정감사 등을 진행했다.
9월 정기국회는 이명박 정부의 정운찬 총리 후보자 지명으로 청문회 국회로 시작됐고 민주당은 정운찬 후보자의 임명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했으나 정 후보자는 총리에 임명됐다.
민주당은 10월 이강래의 지휘 아래 이뤄진 국감에서 정운찬 총리 자질 문제, 4대강사업 문제, 세종시 원안 수정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강래는 2009년 10월 한나라당 내 개혁 성향의 초선의원 모임인 ‘민본21’이 주최한 조찬간담회에 야당의 원내대표로는 이례적으로 참석해 협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국감 뒤에는 10월28일 재보궐 선거를 지휘, 당시 선거가 벌어진 5곳 가운데 3곳에서 당선자를 내며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12월 임시국회 예산안 처리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 예산을 놓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등 여당과 또 다시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형오 당시 국회의장은 그와 여야 원내대표의 동반사퇴 카드를 꺼내 들고 예산안의 연내 처리를 강하게 압박했고 2010년 예산안은 12월31일 몸싸움 끝에 저녁 8시40분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의원들만 표결에 참여해 국회를 통과했다.
2010년 들어서도 이명박 정부의 MBC 장악 의혹,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진상규명 등을 놓고 여당과 힘겨루기를 지속하다 5월 임기를 마쳤다.
이강래는 2010년 5월5일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지만 어려운 당을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여당의 미디어법 및 4대강사업 예산안 강행 처리, 세종시 수정안 강행 움직임 등 대형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며 “국회 운영의 최종 수단은 표결인데 민주당의 의석 수로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을 회복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당 지지율 25% 달성’이란 취임 때의 공약은 지켰다”고 말했다.
| ▲ 2018년 12월26일 판문역에서 열린 '동·서해선 남북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서 이강래 한국도로공사 사장(왼쪽부터), 김정렬 국토교통부 제2차관 등 참석자들이 도로 표지판 제막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17대 국회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전북 남원순창에 출마해 59.31%(3만8164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제17대 국회에서 건설교통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정보위원회 등에서 활동했고 예산결산특별위원장, 정치개혁특별위원장 등을 지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개혁추진단장, 민간복합도시TF(태스크포스) 팀장, 부동산정책기획단장, 정당개혁추진위원장 등을 맡았다. 당권파가 주축이 돼 만든 ‘바른정치모임’도 이끌었다.
정치개혁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만 20세이던 선거연령을 19세로 낮추는 데 기여했다.
2005년 건설교통위원회 국감에서 추병직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과 함께 주요 언론이 대형 건설회사의 로비를 받고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 일부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2006년 열린우리당 부동산정책기획단장으로 일하며 재건축 개발부담금제 시행을 위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2007년 2월 20여명의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함께 탈당해 통합신당모임 추진위원장을 맡았고 열린우리당 분열 뒤 생긴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전북도당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7월 통합민주당에 탈당계를 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강래는 8월에 출범한 대통합민주신당에 가입하기 위해 통합민주당에 탈당계를 냈는데 열린우리당 탈당 이후 통합민주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한나라당은 “이 의원은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신당 창당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신당전문가’로 이번 여권 신당 창당에도 기획 업무를 맡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자신의 당적도 모르고 탈당계를 낸 ‘정치 철새의 블랙코미디’”라고 비판했다.
2007년 17대 대선 당내경선에서 선거대책본부장, 본선에서 상임선대본부장, 전북총괄선대본부장 등을 맡아 당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도왔다.
정동영 후보는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졌지만 고향이자 이강래의 지역구인 전남 순창에서 전국 248개 시·군·구 가운데 가장 높은 90.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6대 국회
2000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북 남원순창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해 53.49%(3만9661표)를 얻어 국회에 입성했다.
16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당선된 뒤 다시 새천년민주당에 복귀했다.
16대 국회에서 건설교통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행정자치위원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등에서 활동했다.
2000년 8월 임시국회 회기 중 당 지도부의 출국 금지 권유를 어기고 강운태, 정범구 의원 등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해 ‘작은 반란’ ‘소신 의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초선 의원으로 강한 이미지를 남겼다.
민주당은 당시 단독국회를 열기 위해 의원들의 외국 출장을 자제해줄 것을 권유했는데 이강래 등 민주당 의원 3명은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의원외교 활동을 떠나며’라는 성명서를 통해 “약사법이 통과된 상황에서 야당의 극한 반대 속에 더 이상 여당만의 단독국회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신을 품게 됐다”며 “미국을 방문해 국가간 약속을 지키는 것이 국익에 더욱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반기 행정자치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전문가들과 10여차례 넘는 면담을 거쳐 ‘전자민원 시스템 구축의 문제점’ ‘사이버테러 현황과 대처방안’ 등의 연구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의 대선기획단 산하 전략기획실장, 기획특보 등을 맡아 노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노 대통령 당선 뒤에는 민주당 개혁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다. 민주당 대신 새로운 당을 계획하다 2003년 9월 3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고 후에 지속적으로 당을 탈당한 의원들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2003년 11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놓고 한나라당 의원들과 고성을 주고 받다 이병석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몸싸움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이강래는 예산결산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를 맡았다.
2004년 3월12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 송영길, 이종걸, 장영달 의원 등과 함께 막판까지 의장석을 사수하다 ‘질서 유지권’을 행사하는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갔다.
△국회의원 당선 이전
1990년 꼬마민주당 김광일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 눈에 들어 크게 성장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이 패배한 뒤 영국에 체류할 때 수행하는 등 김 전 대통령과 가까워 김대중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처음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 임명됐다가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재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에서 연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2000년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내다 16대 총선에서 전북 남원순창군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